2017.4.23.하나님의 탄식(호세아4:1-10)

[성경본문] 호세아4:1-10개역개정

1.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2.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3.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거기 사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4.그러나 어떤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처럼 되었음이니라

5.너는 낮에 넘어지겠고 너와 함께 있는 선지자는 밤에 넘어지리라 내가 네 어머니를 멸하리라

6.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

7.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8.그들이 내 백성의 속죄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그들의 죄악에 두는도다

9.장차는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동일함이라 내가 그들의 행실대로 벌하며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리라

10.그들이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음행하여도 수효가 늘지 못하니 이는 여호와를 버리고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제공: 대한성서공회

하나님의 탄식(호세아4:1-10/2017.4.23.오전)


1. 지난주에 관서공항에서 어느 목사님에게서 받은 정기간행물의 표지에 정채봉이라는 분의 시가 실려 있었습니다.

배경에는 눈 덮인 백두산 천지와 그 배경의 일부가 보이는 칼라 사진 위에 다음과 같은 시가 쓰여 있었습니다.
아! 이렇게 웅장한 산도/ 이렇게 큰 눈물샘을 안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겉에서 보는 백두산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압도당할 만큼 그렇게 아름답고 웅장하고,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늘 위용이 있어 보였는데, 이런 산도 올라가서 보니 밑에서는 보이지 않던 그곳에 눈물을 가득 담고 서 있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천지에 담겨진 깊은 물을 산의 눈물로 본 것이 이채로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때, 그 분은 늘 전능하심과 위대하심과 거룩하심에 충만하시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이 겪는 슬픔이나 아픔이나 눈물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늘 슈퍼맨처럼 그렇게 존재하고 계신다고 생각했는데, 호세아서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우리 하나님도 그 사랑하는 자녀들 때문에 가슴 아파하시며 때로는 눈물을 흘리시며 애를 태우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한 마디로 음녀 고멜처럼 사랑하는 남편을 배신하고 떠난 자신의 신부된 이스라엘에 대한 탄식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읽어보면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행위대로 하면 이미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는 파탄이 나도 여러 번 깨어진 그런 관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도 제 마음대로 무시하고 잊어버리고 살다보니, 자신들과 하나님과의 사이에 언약이 존재하는지 조차도 모른채, 마치 이방인들처럼 하나님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2. 선지자 호세아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행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1-2).
지금으로부터 거의 3천 년 전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늘 이 시대의 모습처럼 그렇게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저 만의 느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마치 선지자 예레미야가 범죄함으로 고통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슬픈 노래를 부르며 탄식하듯이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슬프게 하면 불효라고 하듯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슬프게 만들면 그것은 불신앙이요, 불신앙의 끝은 심판이요 멸망이고 영원한 고통일 뿐입니다.
도대체 이스라엘의 행위가 어떠했기에 하나님으로 하여금 슬픈 노래를 부르시도록 만든 것입니까?
여기에 대하여 선지자가 제일 먼저 증거한 것이 진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진실은 히브리어로「에메트」 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예의 바르고 책임감 있는 그런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진실이 없다는 이 말은, 한 마디로 이스라엘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마치 그들의 행위와 언어를 하루 이틀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켜보고 경험해 본 자가 그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처럼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뢰를 잃어버린 사랑, 신용할 수 없는 인간관계, 진실함이 없는 나라와 민족을 한 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고통하고 슬퍼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결과는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막장 드라마처럼 그렇게 흘러가다가 다 함께 멸망하는 것입니다.

3. 계속해서 선지자는 이스라엘 가운데 성실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성실은 불쌍한 이웃에 대한 배려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이런 행위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어떤 선한 행위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기준에 도달했기 때문에 베푸는 그런 것이 아니라, 스스로는 도무지 사랑을 받을 만한 것도, 은혜를 입을 만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부르시고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신 것은,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희도 서로 불쌍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이런 사랑을 받고 나서는 교만에 빠졌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릴수록 영적으로나 육신적으로나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의 나락으로 점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라면 무엇으로 단장을 해야 합니까?
거룩함으로 순결을 지켜야 신랑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출34장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시면서 그들에게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받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열방에 나타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당연히 이 언약의 대상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방 가운데 나타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 만난 이웃을 외면하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결국 강도 만난 이웃을 구원한 것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로부터 온갖 멸시 천대 차별을 받아오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4. 제가 일본에 와서 얼마 되지 않아 느낀 점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기독교 복음화가 30%라고 과시할 때였고, 일본의 경우는 1%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은 복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복음적인 삶을 살고 있었고, 한국은 복음은 있는데 비복음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농담으로 하는 말들이 감옥에 가 보면 예수 믿는 사람 천지라는 것입니다.
교인이라고 하면서 거짓말 잘 하고, 사기치고 도적질 하고, 이웃 사람들을 깔보고 무시하고, 시간 약속에서부터 시작하여 약속을 잘 안 지키기로 유명하고, 도무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향기는 고사하고 그들의 삶에서 악취가 풍겨나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우선 말을 아끼고 사람들의 말을 경청합니다.
남을 배려하는 것이 어릴 때부터 훈련을 받아서 몸에 배었습니다.
정치나 종교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천황에 대해서는 비판하거나 논쟁하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로 떠들기 시작하면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사람은 맛이 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다 도망갑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이런 문제는 거품을 물고 이야기 하고 혈압을 올립니다.
나중에 보면 그런 내 태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무안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성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5. 우리나라에서 최근에 일어난 대표적인 사건이 대통령 탄핵에서 시작하여 파면, 구속에 이르는 과정과 집단 떼거리들의 반란과, 그리고 대통령 선거전입니다.
요즘 흔히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좀비들의 모습처럼 볼썽사납고 흉포하기 이를 데가 없으며, 보는 이로 하여금 유치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 나라의 국민이라는 것에 대하여 자괴감이 들 정도입니다.
많은 자료와 증거에 의하면, 원자폭탄을 맞아 일본이 항복하자, 한반도에서 도망을 가던 일본 사람들을,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을 주면서 돌아가는 길을 막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장개석 같은 분은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침략자로 지배자로 있었을 때에는 애국심과 분노로 저항했지만, 이제는 그들이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으니 인간 본연의 감정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70여년의 세월 동안 사람들의 정서나 마음이 변해도 너무 변하고 말았습니다.
현직 대통령을 탄핵할 때에만 해도 설마설마 했는데, 대통령이 파면 당하고 구속까지 당했는데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사람들이나 언론들이 계속 공격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이성과 감성을 잃은 좀비가 따로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 후보로 나온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과, 언론들이 매일 사명감을 가지고 뱉어내고 있는 언어들은 그들만의 수준이 아니라, 그것을 듣고 보고 있는 우리들의 수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유치하고 더러운 지적수준과 삶의 수준 속에서 우리 자녀들을 키우고 있으며, 이웃과 함께 미래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 부끄러울 뿐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우리를 보실 때, 과연 진실이나 성실만이 없다고 하시겠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 상실, 영적 상실입니다.

6. 선지자는 계속해서 이스라엘에게 없는 것 또 다른 한 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에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지식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다아트 엘로힘」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인간에게 지식이 없다고 한다면, 학습하는 능력이 없다고 한다면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기록에 보니 물고기의 기억력은 1초 미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방금 당한 일도 눈 한 번 껌뻑하는 사이에 다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낚시 바늘에 붙은 미끼를 물고 한 번 혼이 났으면서도 그것을 또 다시 횡재만난 것처럼 다시 물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멍청한 인간을 닭대가리로 폄하하는데, 이제는 물고기 대가리라고 표현해야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 분이 자기 백성에게 대하여 행하신 일이 무엇이며, 자녀된 구원받은 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거듭 배신하는 고멜과의 결혼 생활에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과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 호세아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그 분이 자기 백성에게 전하시는 말씀을 자신의 삶을 통해 전달했습니다.
그러므로 호세아의 눈물은 하나님의 눈물이며, 호세아의 안타까운 심정은 하나님의 심정이며, 호세아의 고통은 곧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고통인 것입니다.

7. 본문 1절에서 선지자 호세아는,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고 했습니다.

이유는 6절을 통해서 이미 밝힌 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마치 물고기에게 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물 없는 물고기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생존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말씀에 대하여 고백하기를,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고 하면서,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19:7-8.10)고 하였고, 그래서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19:1-2)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스라엘은 지혜의 근원이 되며 능력과 축복의 근원이 되는 여호와의 말씀을 버리고 외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없는 삶이 더 즐겁고 내가 원하는 대로 죄의낙을 누리면서 마음껏 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삶의 미래를 그 어디에서도 보장해주고 있지 않으며,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후반부에서도 그 사실을 세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들이 무엇입니까?

8. 말씀을 떠남으로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진실과 성실은 물론이고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사실을 6절에서 밝히기를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삶은 비참함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구체적으로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적질과 간음과 유혈의 반복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 사는 것이 아니라 생지옥에 빠진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결국에는 종교적인 시스템과 국가 붕궤의 사태에 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이 드리는 제사를 거부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이 제사를 거부하십니까? 11절 이하를 보시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말 듣지 않는 자식을 징계할 때, 그 마음이 아프지 않으면 부모의 마음이 아닙니다.
하물며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이 원수된 죄인이라도 구원받아 한 사람도 멸망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그 죄를 용서하시고 씻어주신 그런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며,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아무것도 모른채 겉으로만 보면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로 모이지만, 실상은 사랑하는 자를 향하신 안타까운 탄식이요 눈물인 것입니다.

9. 죄인을 향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고멜처럼 거듭된 배신으로 더러워진 몸이라도 탄식하시며 기다리시는 하나님께로 우리가 돌아가기만 하면, 그 분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며 거듭나게 하시며 이전의 일은 기억도 하지 않고 우리를 영원한 신부로 사랑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이 사실을 선지자 호세아는 6: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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