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2.5.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호세아1:10-2:1)
[성경본문] 호세아1:10-11개역개정
10.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11.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제공: 대한성서공회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호세아1:10-2:1/2017.2.5.오전)
1. 요즘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 국가의 장래와 더불어 우리 자녀들의 미래가 걱정스럽습니다.
일부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실망을 넘어 절망을 느끼게 되는 것은, 과연 우리 자녀들이 이런 모습을 보고 자라난다면 나라와 민족의 미래가 불을 보듯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면서 힘을 하나로 합쳐도 어려운데 우리는 자꾸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면서 이제는 이웃이 서로 원수가 되고 있으니 과연 이것이 오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문명국가의 모습이냐는 것입니다.
마7:6절에 보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와 내 민족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소중한 것들이 얼마나 귀한 것이며 가치 있는 것인 줄 모르고 그것을 함부로 다룬다면, 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의 삶이나 지성은 물론이고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개나 돼지 수준 밖에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국내외적으로 볼 때, 지금까지 사람들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너무나 많은 것들이 무너지고 사라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에 대하여는 전연 관심도 눈길도 주지 않고 있습니다.
어제 뉴스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사용하는 프랑스 제품의 귀저기에 독성물질인 다이옥신과 살충제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한국 주부들이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의 피부는 물론이고 항문을 통해 그런 독성물질이 들어가서 몸을 망가뜨리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이렇게 지나친 욕심과 이기주의에 빠져 그 달려가는 끝이 어디인지도 모른채, B.C 722년에 이스라엘이 멸망하듯이, 1975년 4월30일에 월남이 어이없게 붕궤되었듯이 그렇게 무너져 가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2. 호세아서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떠난 너희는 음행한 여인과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아내가 된 고멜만이 음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 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그것이 곧 하나님께 대한 음행이라는 것입니다.
언약의 백성이 받은바 사명을 잃어버리고 욕심을 따라 제 멋대로 사는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음행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적이 없다면,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우리가 제멋대로 살았다면 누가 우리를 음행한 여인이라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미 호세아서의 두 번에 걸친 설교를 통해서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며 귀한 은총이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랑해서도 안되는, 사랑할만한 가치조차도 없는 우리를 일방적으로 사랑하시고 은혜 베푸시는 그 하나님이 이 사랑을 위해 치루어 주신 그 대가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모를 때에는 용서받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잘 알면서 짐짓 그렇게 행하면 진노와 형벌은 가중되는 법입니다.
인생이 그 누구라도 자기 죄 때문에 망하는 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죄인이고 모두가 연약하고, 완벽한 인생은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한 것은 자신들의 죄가 그 원인이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호세아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 앞에 회개하고 돌이키기는커녕, 끝까지 외면하고 죄악의 길로 여전히 달려갔기 때문입니다.
3. 그런데 본문 10절에 보면 지금까지 엄중한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이 반전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음란한 여인처럼 그렇게 살았던 이스라엘이 비록 지금은 심판을 받아도 영영 망하지 아니하고 때가 되면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형편이 아무리 처참하고, 소망이 없어 보인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것은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어도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언약에 충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셨고, 그래서 그들이 다시 돌아오는 날에는 솔로몬 시대처럼 축복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미래를 보시면서 나의 백성이요 나의 아들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부부가 살다보면 싸우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심하게 다투고 두 번 다시 못 볼 사람들처럼 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원수처럼 생각하던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지면서 다시 화해하고 여전히 사랑하는 관계로 회복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객관적으로 보면 결혼할 때 하나님 앞에서와 증인들 앞에서 한 몸 이루기로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 언약에 충실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보면 부부가 살면서 소위 미운정 고운정이 다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상대방의 약점이나 잘못이 다 이해가 되고, 얄미웠던 모습까지도 사랑스럽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호세아서에서 우리와의 관계를 부부로 비유하고 계시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4. 그래서 진노 중에라도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소망을 주시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11절에 보니 유다와 이스라엘의 통일된 국가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한 우두머리를 세우신다고 하였는데, 이 우두머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표현을 보면 왕이라고 하는 것이 어울릴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미 남북 왕조를 가리지 아니하고 지금까지의 인간왕조들이 쏟아낸 온갖 더러움과 그곳에 대한 실망감이며 죄악의 모습들을 떠올리기도 싫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통일국가를 이룰 때 한 우두머리가 이스라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유다왕국, 즉 다윗왕가에서 나와야 하는데, 이것은 호세아 선지자의 언약중심의 신앙에 기초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을 완벽하게 심판하여 두 번 다시 죄악으로 인하여 인간이 고통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은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자라도 다시 살리시고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원래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죄인을 향하신 긍휼하심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용서하시고 모든 저주와 고통과 흑암의 세력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그 분을 향한 감사와 기쁨의 찬양으로 가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앙의 진정한 승리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구원의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자신의 믿음을 계속 세우며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세상 속에 숨어서 역사하는 마귀는 지금도 우리를 흔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도록 만들어서 영원한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말씀을 내게 주신 말씀으로 붙들고 씨름하면, 어떤 시험과 핍박이 와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말씀으로 우리의 반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승리자가 되는 줄 믿습니다.
5. 계속해서 2:1절에 있는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고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리라" 는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고쳐서 그들에게 새 이름을 주시듯이, 범죄한 이스르엘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스라엘로 회복시키며, 박해자 사울을 전도자 바울로 변화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의 유희를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 호세아가 고멜과 결혼해서 낳은 자녀들의 이름을 암미를 로암미로, 루하마를 로루하마라고 지었는데, 본문 1절에 보면 그 이름 앞에 붙은 「로」 라는 글자를 떼어 버렸습니다.
「로」 라고 하는 글자를 어떤 단어 앞에 붙이게 되면 뒤에 오는 단어의 의미를 반대로 만들어 버리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 백성이라는 의미의 「암미」 는 내 백성이 아니라는 의미가 되었고, 긍휼하심을 얻는다는 의미의 「루하마」 는 긍휼하심을 얻지 못한다는 의미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원래는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을 입는 존재였지만, 불순종함으로 그들 앞에는 「로」 라고 하는 고통과 부끄러움이 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저주의 부적과 같은 「로」 가 다윗 왕가에서 나오는 한 지도자를 통하여 원래의 모습을 되찾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르엘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원래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로서 하나님이 흩어버리신다는 그런 의미를 가진 단어로 예후가 아합 집안에 하나님를 대신하여 심판을 행할 때 붙여준 이름이지만, 또 다른 의미로는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사마리아의 이스르엘은 풍성한 옥토로 된 지역의 이름입니다.
6.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러한 언어의 유희를 하면서 그들에게 미래에 대한 소망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키면, 긍휼과 은혜로 그들을 용서하시고 축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르엘도 해석하기에 따라 그들의 미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똥꿈을 꾸면 돈이 들어온다고 해석을 합니다.
기분 나쁜 것도, 잘못된 것도 해석하기 나름입니다.
요셉이 꿈꾸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지 인생 해석을 잘 했습니다.
형님들에게 그렇게 많이 당하고 고생하여 죽을 뻔 하고, 나중에는 형님들 손에 의해 애급에 노예로 팔리고 말았지만, 저가 애급의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먹을 것이 없어 양식을 구하러 온 형님들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45:5) 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흉년을 대비하여 야곱의 식구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먼저 애급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동생 팔아먹었다는 죄책감이나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꿈이 잘못되어도 해석이 좋은 것처럼, 현실이 이해가 안되고 어려워도 해석을 잘하면 축복이 되고 소망이 되고 은혜가 되는 줄 믿습니다.
7. 어찌되었든지 하나님이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처음에는 선지자 호세아를 통하여 심판을 선언하시면서, 음란한 여자에 비유하여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것처럼 진노하셨지만, 이제는 다시 긍휼과 은혜를 선언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답이 2:23절에 있는데,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라 하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 서두에 "내가 나를 위하여" 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심판의 경고장을 보내고 있지만, 그들이 징계받은 이후에 포로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을 회복시키고 축복하는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보면 분명히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오는 그 조상들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함인 것입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변할 수도 없는 것이요 변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요즘 일본이나 한국이나 국회에서 법을 다수당들이 자기들 입맛에 맞추어서 마음대로 고치고 없애고 만들고 하는데, 하나님의 약속은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고치거나 변경하거나 취소할 수 없는 것이 언약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절대 주권이 있으며, 창조의 능력을 소유하셔도 하나님 스스로는 우리와 맺은 그 언약을 늘 소중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한 번 정하신 언약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줄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연약하고 허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또 한 가지의 이유는, 하나님 스스로가 죄인을 용서하시고 축복하시고 은혜를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이것이, 하나님 자신에게는 가장 잘 어울리고 스스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분이 가지고 계시는 속성 자체가 이러한 일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말하기를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3:2) 하였고, 그래서 시편기자도 말하기를 "주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30:5) 고 노래 하였습니다.
8. 지난주에는 호세아 가정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은총이 풍성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호세아의 자녀들 이름 앞에 붙어 있던 「로」 라고 하는 이 저주의 인이 십자가의 보혈로 씻겨 내려감으로 그들은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본문의 말씀을 로마서 9:25-26절에서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구속하신 그 사랑하심에 유대인이나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에게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그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귀한 것인지 다시 한 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사랑에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바른 반응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 분의 진노가 임하기 전에, 이스라엘처럼 그 분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9.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다 내려놓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음란한 여인처럼 남편된 하나님을 무시하고 배반하면서도 그것이 부끄러운 일인 줄로 모르고 살았던 그 과거의 삶을 회개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던 온갖 우상들을 다 부수고 버리고 태우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감사하며,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는 내가 사랑할 자가 없음을 고백하며 구원의 은총을 노래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고멜처럼 음란한 여인이라는 부끄러움을 씻을 수도 없으며, 장차 그 분의 진노 또한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사도야고보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약4:4) 고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