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9.이것은 불법입니다(호세아1:6-9)

[성경본문] 호세아1:6-9개역개정

6.고멜이 또 임신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7.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8.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제공: 대한성서공회

이것은 불법입니다(호세아1:6-9/2017.1.29.오전)


1.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젊은 부부가 자동차로 시골길을 여행하고 있었는데, 그만 대형트럭이 와서 그들과 충돌을 했고, 다행히 남편은 경상으로 그쳤지만 아내는 위독한 상태였습니다.

그런 아내를 품에 안고 앰브런스에 실려 가면서 하나님께 아내를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남편의 기도를 들으셨는지 오랫동안 사경을 헤맨 끝에 아내는 기적처럼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한 가지 생겼습니다.
아내는 기억상실증에 걸렸고, 그래서 남편이 우리는 부부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듣지 않았으며, 그렇게 오랜 시간을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남편은 결심을 했습니다. 이 여자를 처음부터 다시 사랑하기로 한 것입니다.
완전히 남이 다 되어버린 그 여자를 다시 사랑하고 두 번째 결혼을 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가 출생했는데, 사람들은 그 남자에게 왜 정신적으로 불구가 된 이 여자를 왜 그렇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지 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이 남자의 하는 말이, 두 사람이 처음 결혼할 때 하나님 앞에서 두 사람이 어떤 일이 있어도, 병이 들었을 때에나 건강할 때에서 늘 사랑하고 함께 하기로 서약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 저는 호세아서 1장을 반복해서 읽어내려 가면서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는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불법이라는 사실입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이 죄인된 인생을 사랑하실 때 그 사랑은 사랑해서는 안되는 것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예로 본문의 내용을 보면, 선지자가 음란한 여인을 사랑하고 데려다가 결혼하여 자식을 낳는다는 이 사실은 율법으로 보거나 이스라엘의 정서적으로 보아도 아무리 생각해도 분명히 용납이 안되는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불법적인 행위를 선지자에게 강요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평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되라(출19:6, 22:31)고 그렇게 강조하셨는데, 지금 호세아 선지자에게는 반대로 음란한 여자를 데려다가 사랑하고 음란한 자녀를 낳으라고 명령하고 계시는데,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으로서 이것은 도무지 상상이 안되는 말씀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는 십계명과 율법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부정한 것을 거룩하게 만드는 계명들입니다.
특히 20장에 보면 도덕적으로 더러운 행위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 가증히 여김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더러워진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예식과 제사들이 있는지 복잡하고 까다롭기가 보통이 아닙니다.
더러운 것은 가까이 하지도 말고 부정한 자는 진 바깥에 격리를 시킬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지금 선지자에게 부정한 일을 명령하고 계시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3.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 스스로 이 불법적인 행위를 온 이스라엘의 눈앞에서 이 일을 들어내어 행하도록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호세아 선지자와 음란한 여인 고멜과의 결혼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앞에 공개적으로 이런 일을 행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4절에 보면 이스르엘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이름이 비슷하니 그 의미도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정 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축복의 이름입니다.
야곱에 얍복강에서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름입니다.
이 이름이야말로 이스라엘 나라와 민족과 역사는 물론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해 내고 있는 매우 의미 있는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스르엘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그들을 흩어버리겠다는 의미의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왜 축복의 사람들이 이제는 저주의 대상이 되고 말았는지 의문이 갑니다.
4절의 말씀을 지난주에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그 내용은 아합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을 떠나서 바알신을 시작으로 온갖 우상숭배에 빠지면서, 하나님 두려워할 줄 모르고 패역한 정치를 한 것입니다.
그의 아내 이방 여인인 이세벨은 그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는 무섭고 독한 여자였습니다.

4. 하나님이 아합의 집을 심판하실 때 예후라는 사람을 들어서 사용하셨습니다(왕하10:19-
24). 예후는 이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잘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예후의 집안을 축복해 주셔서 이스라엘의 왕위를 4대 동안 이어가도록 해 주셨습니다(10:30).
그런데 문제는 그가 왕이 된 후에는 하나님을 떠나서, 이스라엘의 10지파를 거느리고 여로보암이 애급에서 가져온 우상인 금송아지 우상을 섬겼고, 특히 아합을 처단하는 혁명을 일으킬 때 지나치도록 많은 생명을 죽이면서 무자비하게 숙청을 단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처음에 약속한 대로 왕위를 4대 동안 이어가도록 하셨지만, 그 기간이 끝날 때 철저하게 심판하신 것이 4절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북왕국 이스라엘은 누구를 왕으로 세워도 똑같이 악한 왕들이었고, 하나님을 섬기는 왕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언약의 백성이라고 하여도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은 더 이상의 이스라엘이 아니요, 축복의 자손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가리켜 이스르엘이라고 하였고, 이름의 의미 그대로 스가랴 임금 때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하고 말았습니다.
예후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아합의 죄에서는 떠났지만 그 대신에 다른 우상과 연합하여 아합왕 이상으로 범죄하였고 타락했던 것입니다.

5. 이러한 이스라엘의 온갖 죄악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그의 자녀들의 이름을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를 선언하는 이름을 만들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첫 아들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였고,
둘째는 딸로 로루하마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긍휼이나 사랑을 받지 못할 자라는 것입니다.
여자 아이로서는 치명적인 이름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아들로 로암미라고 이름했는데 이것은 내 백성이 아니라는 의미였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 버림받은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어쨋던 호세아의 자녀들은 전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자식에게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은 온갖 불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과는 상종을 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요, 두 번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며, 그들 앞에는 오직 그들이 범죄한 죄에 대한 심판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실이 본문 6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이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7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곳에 보면 "그러나 내가" 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7절의 내용은 이스라엘을 향한 내용이 아니라 남왕국 유다를 향한 약속이고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구원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유다는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유다와 베냐민 족속만을 거느린 더 작은 나라입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제사장의 사명을 가진 레위지파가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범죄하고 타락해도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유다 족속을 통해서 나타날 메시야의 언약 위에 나라를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유다 나라의 마지막 순간까지 혁명이 없이 다윗왕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세상 나라들처럼 군대의 힘으로 구원하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구원하실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6. 그러나 북왕국 이스라엘이 여로보암2세 때에 부국강병을 이루면서 교만하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의 힘을 믿었기 때문에 그래서 하신 말씀입니다(6).
이전에 다윗은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과 싸울 때에,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고 하면서,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17:47) 고 고백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본문 7절의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두 번 다시 이스라엘 너희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이 "그러나 내가" 라고 하면서, 7절에서 유다의 구원을 말씀하고 있으며, 10절에 가서는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게 될 것이라고 하였고, 이스라엘을 가리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표현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너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들" 이라고 선언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언은 사실 잘못된 내용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선언하신 첫 번째 내용하고는 반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불법을 행하면 누구라도 그 행위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치루어야 합니다.
사도바울도 그 대가에 대해 분명히 선언하기를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계명들을 어기고 그 명령들을 짓밟으며 우상을 섬겨 하나님을 진노하게 만들고 있는 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분명히 심판을 선언하시고는, 곧이어 너는 내 아들들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으니 성경을 읽다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죄인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사랑의 실제입니다.
원래 하나님에게는 죄악과 우상숭배의 온갖 더러움을 견디기 어려워하시는 공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행위를 따라 심판하시면서도 영영 죽이거나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회복하고 돌이키도록 만드시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라도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7. 아버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은 심판하시는 공의와 거룩하심에 위반되는 불법이기 때문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엄청난 대가를 치루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서 무엇이 보입니까?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냐, 아니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죄인된 우리인가?
이 양자선택에서 그 분은 자신의 아들을 버리고, 죄인된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원하신 사랑이 십자가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 때문에 치르신 대가는 너무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살면서 자신을 위해 늘 최선의 것을 선택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남다른 가치가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남들에게 자랑이 되는 것이나 더 좋은 것들을 선택하고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런 것을 지혜라고 생각하고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 하늘을 덮고도 남을 지혜와 수천만 개의 지구를 만들어 낼만 한 그런 능력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웬일인지 우리를 사랑하심에 있어서는 빵점짜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벌레만도 못한 인생인데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수도 없이 배신하면서 하나님의 뒤통수나 치면서 살던 그런 인생이었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을 만한 가치도 모습도 없는 존재들입니다.
사랑할만한 가치를 가진 것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사랑할 가치도 없고 사랑해서도 안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셨고, 그 가운데서도 죄인의 괴수 같은 우리를 받아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자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바로 이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잃으셨던 것입니다.

8. 지금 우리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안에서 선악이 부딪히면서 서로 주도권을 가지려고 할 때입니다.
한쪽에서는 친구하고 술 마시러 가자, 다른 한 쪽에서는 너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어울리지 않다는 하면서 서로 싸울 때 갈등과 고통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죄인을 가까이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에서 보면 율법을 범하는 불법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죄인을 보면 불쌍하고 자신의 죄로 멸망해 가는 인생을 볼 때 무엇을 희생하고서라도 살리고 싶고 구원하고 싶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면 사랑하실수록 그 분에게는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유행가 가사처럼 눈물의 씨앗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고통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신의 고통을 선지자의 결혼을 통해서, 선지자의 가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가운데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호세아 선지자도 죄인을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고통에, 고멜과의 결혼을 통해서 함께 나누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의 비극이며 자녀들의 불행까지 선지자는 감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느 부모가 제 자식의 이름을 이렇게 짓겠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에 호세아는 주저함이 없이 이 일을 행하였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9. 이전에는 다윗왕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말할 수 없는 수치와 고난을 겪었습니다.
한마디로 이것은 자식이 아니라 원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압살롬을 그리워하고 다른 자식 누구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요압의 손에 죽임을 당하자(삼하18:14-15), 다윗왕은 차라리 자신이 대신하여 죽기를 원하면서 그렇게 많이 울었습니다(18:33).
그가 아버지 앞에서 행한 일들이 인륜에 반하는 그런 행동을 했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다윗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죽을죄를 지은 자식이라도 용서받기를 원하고 사랑받기를 원하고, 불법은 물론이고 그보다 더한 선택인 차라리 자신의 생명을 대신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하심은 대단한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만 음욕을 품어도 간음한 것이라 하였고, 욕심만 품어도 도적질 한 것이고, 마음으로 미워만 해도 살인죄로 정죄됨을 알 수 있습니다(마5장).
그래서 구약에서는 범죄한 대가를 똑같은 방법으로 지불하도록 했습니다.
그것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 지니라" (출21:24-25)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눈이나 손이 범죄하며 그것을 빼어내고 찍어내 버리라고(마5:29-30) 하시면서, 그것과 함께 지옥에 가는 것보다 눈이나 팔 하나 잃어버리고 천국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원래부터 이렇게 엄격합니다.
그러하니 과연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10. 율법으로 보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불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불법의 대가로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통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죄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엄청난 희생을 치러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더러운 것도 사랑하면 씻어 깨끗함을 입을 수 있으며, 아무리 망가진 인생이라도 사랑 받으면 고칠 수 있고,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도 사랑이 있으면 소망이 있습니다.
율법의 정죄함도 사랑이 있으면 그 율법을 이기고 용서받고 넘어갈 수 있으며, 하나님의 참 사랑 앞에서는 마귀도 참소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사랑을 입었음을 확신한다면, 그 어떤 문제나 어려움이 와도, 환란이나 시험에도 흔들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와 죄악으로 망해가는 이스라엘을 살리시고 또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선지자와 함께 고통을 당하셨고 엄청난 희생을 치러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호세아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죄인을 향한 사랑과 은혜는 갈보리 산상의 십자가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호세아의 가정을 통해서도 십자가의 사랑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하여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에게와 오늘 우리에게 까지 차별없이 변함없이 나타난 줄 믿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늘 감사하면서, 오늘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풍성하게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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