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2.인생의 멍에(호세아1:1-5)
[성경본문] 호세아1:1-5개역개정
1.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2.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
3.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4.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5.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제공: 대한성서공회
인생의 멍에(호세아1:1-5/2017.1.22.오전)
1.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정작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또 그 분이 왜 우리 같은 못난 죄인을 스토커처럼 따라 다니시면서 사랑하시며, 그렇게 하시는 목적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도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무조건 믿으면 구원받고, 하나님은 한 번 정하신 것에는 변함이 없으시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대로 믿으면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내 보잘 것 없는 지적인 기능과 얄팍한 감정은 적당한 선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정하면서, 신앙생활도 남들 눈치를 보면서 적당히 해 나가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수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옛날에 뿌리깊은 나무라는 잡지가 있었는데, 1977년도 11월호의 것을 보니, 「천당을 찾다가 지쳤다」 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어머님을 따라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중학교 교사가 쓴 글인데, 그곳에는 교인들이나 목회자들, 그리고 교회의 실상의 일부분들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 있었습니다.
평소에 교회의 이중적인 모습과 지나친 세속성에 갈등과 불만을 가지고 있다가, 1965년에 월남에 파병되었는데, 베트콩의 공세로 인해 매일 동료들이 죽어나가는데, 크리스마스가 되었다고 칠면조 특식이 나왔는데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생과사의 갈림길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그 때 점령지의 수녀원에서 부대원들이 함께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대장의 간절한 기도가 그곳에 참석하고 있는 동료들의 가슴을 울렸고, 그들이 부른 노래는 찬송가가 아니라 화이트 크리스마스였으며, 예배 마지막 순서로 다 같이 고향의 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자신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참된 예배를 실감했다고 하면서, 참된 곳에는 형식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한국교회의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예배에서 느끼지 못했던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았다고 했습니다.
삶과 죽음의 문턱을 오가는 비정상적인 그런 현실 속에서 이런 예배를 드린다면, 그 간절함과 감동은 누구라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오늘부터 호세아서를 가지고 매주일 말씀을 강론하려고 하는데, 호세아서의 핵심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호세아서의 중심사상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이 없는 사랑이고, 둘째로 인간은 하나님의 이 사랑을 받을 자격도 없는 절망적 상황의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누가 기록한 내용인지, 그리고 그 기록이 사실인지 공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인터넷상에서 떠돌아다니는 "아내의 빈자리" 라는 글이 좋아서 교회 홈페이지에 올렸습니다.
아들 하나를 낳고 아내가 먼저 가버렸는데, 남은 그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쓴 내용이었습니다.
6살 먹은 아들이 아버지를 생각해서 행동하는 것을 아버지가 이해를 못해서 오해가 일어나고, 그래서 매번 아들을 두들겨 패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어린 아들의 속 깊은 생각을 알았을 때 아버지가 받은 충격, 그리고 아내의 빈자리에 쏟아내는 슬픔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부족하고 허물이 많으며, 늘 자기중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하여도 서로 간에 오해와 갈등은 반복되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알지 못하면 오해가 생기고,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면 갈등이 증폭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 그것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할 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당연히 정상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호세아서는 이런 우리의 문제점들을, 그리고 의문들을 다 풀어낼 수 있는 귀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3. 호세아 선지자는 북방의 앗수르에 의해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가 함락되기 전인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대, 즉 이스라엘이 가장 번영하던 시기인 기원전 8세기에 선지자로 활동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전성기도 잠깐이고 여로보암 2세가 죽은 후, 약 20여 년 동안 6명의 왕들 대부분이 무력으로 정권을 차례차례로 찬탈하면서 정국이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다가 앗수르에 의해 국가가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나라와 민족이 안에서 분열되고, 서로 물고 뜯는 이전투구(泥田鬪狗)하는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정치적인 상황이나 국제정세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 호세아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2절의 말씀을 보면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그것도 선지자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충격적인 메시지가 나오고 있습니다.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 는 것입니다.
선지자도 인간이고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누리고 아름다운 사랑을 나눌 대상을 만나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고 싶은 것은 당연한 권리이고 순수한 욕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지자의 그런 권리나 욕구를 단순에 짓밟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혹시 선지자가 잘못 들었는지는 몰라도 음란하다는 이 의미는 매춘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매춘부를 데려다가 결혼하고 자녀를 낳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 이유를 보면 더욱 기가 막힙니다.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당시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악이 관영했다고 하여도, 그들의 죄악 때문에 선지자의 생활은 물론 가장 소중한 결혼과 가정을 망가뜨리고, 선지자의 체면을 땅바닥에 떨어뜨린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입니다.
4.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3절에 보니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에 호세아는 한 마디의 항의나 저항도 없이 당장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가서 고멜이라는 음란한 여자를 데려다가 결혼을 하여 아들을 낳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음란하다는 말의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반드시 매춘부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남의 여자를 데려다가 결혼할 수는 없으며, 나중에 돈 까지 지불하는 정황으로 보면 직업적인 매춘부는 아니라 해도 매춘부와 똑같은 행동을 하는 그런 여자를 데려다가 아내로 삼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호세아는 어떻게 선지자의 노릇을 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은 온갖 못된 짓을 하면서 돌아다녀도, 종교지도자가 그들과 어울려 같은 죄와 허물에 빠지는 것을 용납하지는 않습니다.
이유는 사람들이 아무리 타락한 시대를 살아도 내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자신들의 허물과 죄의 짐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 줄 수 있는 사람들, 자신들보다는 더 도덕적이고 거룩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된 사람들이 자신은 엉망으로 살면서도 자식은 바르게살기를 원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어찌되었든지 문제의 핵심은 선지자 호세아입니다.
그는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생각지도 못했던, 인생이 감당하기 어려운 멍에를 지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레21장에 보면 제사장의 결혼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부정한 창녀나 이혼 당한 여인이나"(7), 14절에는 "과부나 이혼 당한 여자나 창녀 짓을 하는 더러운 여자를 취하지 말라" 고 했는데, 선지자 호세아는 이러한 하나님의 계명을 스스로 어기고 말았기 때문에, 그 멍에는 선지자로서는 너무 수치스러운 멍에였습니다.
그 멍에는 한 사람의 가장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의 멍에였습니다.
그 멍에는 이 나라 이 백성들 사이에서 사회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멍에였습니다.
사회가 아무리 타락했다고 해도 선지자만큼은 그 시대의 양심이고 도덕의 기준이 되기를 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향해 얼마나 손가락질을 하겠으며, 선지자가 외치는 회개의 음성에 너나 회개하고 너나 잘하라고 비웃으며 조롱하겠습니까?
5. 우리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에게 대언하는 선지자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이 같이 말도 안 되는 것을 명하시고, 또 선지자는 왜 이 명령에 순종했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이며, 하나님을 떠나 온갖 세상 쾌락이며 온갖 우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기 백성을 향한 참 사랑의 메시지였습니다.
이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삶을 통하여, 결혼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생생하게 표현해 내고자 하는 선지자가 받은 사명이었습니다.
음란한 여인을 데려다가 음란한 자녀를 만들라는 이 명령이, 비록 선지자 자신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치스러운 멍에였지만,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복음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의심도 없이, 주저함도 저항도 없이 즉시 가서 순종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무엘상 6장에 나오는 여호와의 궤를 메고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가 진 멍에와 같은 것입니다(10-16).
12절에 보니 "암소가 벧스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고 했고, 14절에는 "수레가 벧스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렀"다고 했으니, 짐승인 소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메어 준 사명의 멍에를 메고 순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젖을 먹는 어린 송아지를 강제로 떼어놓고, 하나님의 법궤를 제자리에 되돌리기 위해서, 그것을 실은 수레를 끌고 가서 그곳에서 번제물의 희생이 된 이 암소처럼, 선지자 호세아는 이스라엘 구원을 위한 사명의 멍에를 멘 것입니다.
6.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멍에가 있습니다.
가정을 위해서 짊어져야 할 멍에도 있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져야할 멍에도 있으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져야할 멍에도 있지만 인간이라면 공통적인 멍에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죄의 멍에입니다.
이 멍에는 자신의 만든 죄의 멍에로,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을 수도 없으며, 이 멍에는 영원한 죽음과 고통을 가져옵니다.
인간이 행복을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지만, 태어나는 순간 잔인하게도 누구나 원죄라고 하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원죄의 멍에를 멜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면서 행복은 보이지 않고 도리어 고통이 찾아와서 우리 인생을 쉬지 못하게 만들고, 살면 살수록 내가 짓는 자범죄는 더욱 늘어나고, 이 죄가 인간을 병들게 만들고 마침내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벗을 수 없는 이 멍에를 어떻게 하면 벗을 수 있으며, 누가 이 멍에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짐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그 죗값을 치루어 주심으로 벗게 되었습니다.
마11:28절에 보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말씀하시면서, 이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누구나 다 영생을 얻을 것을(요3:15)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죄의 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영접할 때 벗겨지는 줄 믿습니다.
7. 둘째로 인생이 죄의 멍에를 벗게 되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사명의 멍에를 메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짊어졌던 죄의 멍에는 사람을 고통하게 만들고 사람 구실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이 원죄와 자범죄가 사람을 짐승 같은 존재로 전락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를 씻음 받아서 죄의 멍에를 벗는 순간에 인간은 새사람이 되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의인으로서 지고 가는 멍에가 곧 사명의 멍에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죄의 멍에나 사명의 멍에나 다 같이 인간을 힘들고 지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전연 다릅니다.
어머니가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생각하기를 인생의 멍에요 짐이요 원수덩어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울고 보채고 끊임없이 일거리를 만들어 내고, 밤낮으로 어머니를 괴롭혀도 어머니는 이 아이 때문에 못살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괴롭힘 당하는 그 하루하루를 즐거움과 기쁨으로 감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고통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모성애의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새인생으로 새 사명의 멍에를 메면 그곳에서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으며, 그곳에서 삶의 소중함과 인생의 참된 가치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주님이 우리에게 이 멍에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마11:29)고 하셨고, 계속해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30) 고 하셨습니다.
호세아가 자신의 가정, 자신의 자녀들,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철저히 망가진 것 같이 보이지만, 도리어 그는 이 일이 하나님을 떠나 멸망과 죽음의 길로 내려가는 이스라엘을 돌이키고 구원할 수만 있다면 이것은 도리어 선지자로서 복된 일이요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심하거나 저항하거나 도망가지 않았고 묵묵히 이 멍에를 메고 사명의 길로 나아간 것입니다.
8.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짐의 멍에를 벗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가 받은 새로운 사명은 무엇이고 새로운 멍에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요, 그 분의 손에 붙들린 복음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밭을 갈러 나가는 소에게 멍에를 씌우듯이 우리도 받은바 사명의 길로 나아가려면 십자가라고 하는 멍에를 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 갑니다
이제부터 예수로만 나의 보배 삼겠네
세상에서 부귀영화 모두 잃어 버려도
주의평안 내가받고 영생 복을 받겠네(341장)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을 데려다가 음란한 자녀를 낳으라는 가정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온 이스라엘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새로운 은혜와 축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호세아는 자신의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의 이스라엘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보여주었고, 하나님을 떠난 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더러움으로 망가졌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 이외에는 방법이 없는 그런 존재인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철저하게 망가지도 무너진 이스라엘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고 받아주시겠다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9. 오늘 우리가 받은 사명이 선지자 호세아가 받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호세아 시대처럼 하나님을 떠나 크게 음행하는 시대입니다.
선지자를 희생하면서까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이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지금 이 세상도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야말로 스토커처럼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고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요3:16)이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이라도 죄로 말미암아 멸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도시, 이 민족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돌아오는 그날까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증거하는 복음의 사명, 복음의 멍에, 사랑의 멍에를 메고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