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더 나은 제사를(히브리서11:4)

[성경본문] 히브리서11:4개역개정

4.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제공: 대한성서공회

더 나은 제사를(히브리서11:4/2017.1.1.오전)

1. 새해 첫 날이 주일이라서 2017년도는 의미가 깊은 한 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경우는 28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온다고 합니다.
어쨌든 지난 한 해도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큰 은혜와 축복을 누렸지만, 새해에는 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본의 복음화를 위해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많은 복을 받기를 소원합니다.
첫 주의 본문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생각해보니 하나님이 가인과 아벨을 비교하고 계시고,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이 둘을 차별하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비교나 차별 한다는 것은 좋은 의미로 보면 더 많이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만, 부정적인 면에서 생각한다며 매우 좋지 않은 현상입니다.
특히 21세기 사회가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비교하는 것은 도리어 약한 자가 상처를 받을 수 있고 또한 많은 부작용을 가져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 두 사람을 놓고 비교하고 계십니다.
사랑이 풍성하시고 연약한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왜 비교하고 계십니까?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지구촌의 올림픽은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라는 표어를 외치며 지상 최고의 강자를 겨루는 시합입니다.
그런데 약자 편을 들어서 비교하거나 차별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논리대로라면, 올림픽 같은 시합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 자체가 차별이요 비교가 되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4년 동안 열심히 준비하고도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속이 상하고 사처를 받겠습니까? 오죽하면 목메달이라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벨과 가인을 비교하고, 또한 차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를 가지고 이 두 사람을 차별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믿음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 믿음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우리의 믿음을 가리켜 히12:1절 이하에 보면, 우리의 믿음을 경주하는 것에 표현하고 있으며, 심지어 이 믿음 때문에 피 흘리기까지 싸울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이란 올림픽의 금메달과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이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여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 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을 키우고 성장시키고, 더 훌륭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같은 믿음이라도 어떤 믿음은 능력으로 역사하지만, 어떤 믿음은 박물관에 보관된 화석처럼 생명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왜 하나님께서 아벨과 가인을 비교하고 계시며, 그 결과를 따라 그들을 차별하시는지 알아보고,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며, 믿음에 말씀의 날개를 달아서 높이 올라가는 그런 은혜와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아벨과 가인의 무엇을 보고 무슨 목적으로 이 두 사람을 비교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세상에 나온 순서를 따지면 당연히 가인이니 그의 이름을 먼저 부르고, 가인을 중심으로 이 두 사람을 비교하고 해석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보다는 아벨의 이름을 먼저 말하고, 아벨을 중심으로 해서 이 두 사람을 비교하고 계십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3.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본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들의 믿음을 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서두에서 "믿음으로 아벨은"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벨과 가인은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낳은 형제들입니다.
하나님이 보신 것은 그들의 소유나 직업이나 행위를 보신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렇다며 오늘 모인 우리들도 하나님이 제일 먼저 보시는 것은 우리의 삶이나 소유나 능력이 나 인격이 아니라, 우리 안에 심어 놓으신 믿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자랐습니까?
이 믿음을 하나님으로부터 선물 받고 지금까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2016년 보다는 2017년을 더 기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들만 새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새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새롭게 변화된 사람을 제일 기뻐하시고 그들에게 더 큰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 옷을 사면 빨리 입어보고 싶은 것처럼, 하나님도 말씀과 성령으로 새롭게 된 사람을 더 가까이 하시고 그런 사람을 더욱 귀하게 여기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실 때, 가인 보다는 아벨이 낫고, 형보다는 동생이 뛰어난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궁금한 것이 한 가지가 있는데, 아벨과 가인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믿음이란 믿음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마치 씨앗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농부의 손에 들려지고, 그것이 밭에 뿌려질 때, 생명이 나오고 성장의 과정이 있고, 마침내 열매를 맺는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 나타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벨을 인정하시고 가인을 외면하신 것은 그들의 제사를 통해서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믿음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무엇을 보시고 가인의 제사보다 아벨의 제사를 더 기뻐하셨겠습니까?
드린 예물이 형님 것 보다 더 많았다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특별히 좋아하시는 어떤 예물을 준비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4. 창세기 4장에 보면,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범죄하여 추방된 이후로 첫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 내용의 전개를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곳에 보면 가인은 농사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고, 아벨은 다윗처럼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자신들이 종사하고 있는 그 일에서 얻은 것을 가지고 각각 다른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기에 보면 형인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동생 아벨도 자기가 키운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 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해석하기를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제사에 대한 내용들이 나오는데, 피의 제사가 중요하기 때문에 양을 제물로 삼는 것이 곡식으로 제물을 삼는 것 보다 훨씬 좋으며,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죄인을 구원하셨기 때문에 피의 제사를 드린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사에 피가 있느냐 없느냐는 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기에 보면 곡식으로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벨의 시대에는 율법이나 제사의 어떤 명확한 기준도 없었던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인정해 주셨고, 가인의 제사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피의 제사라는 상징적인 의미도 중요하겠지만,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은 아벨과 가인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의 차이점은 한 가지만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믿음으로 드렸느냐 아니냐 바로 이것입니다.  

5.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으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님께 아벨처럼 인정받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이미 서두에서 비교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밝힌 대로 하나님이 아벨을 인정하신 것은 그가 가인보다는 더 나은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더 나은 제사의 조건은 결코 곡식이나 짐승의 피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년 동안 예배하는 사람들을 강단에서 보면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예배에 집중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휴대폰을 만지고 그것을 쳐다보거나, 낙서하거나 시선을 다른 곳에 놓고 예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침 일찍 기도회에 나와 참석하고 예배를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고, 조금 미리 와서 마음을 정돈한 후에 예배에 임하는 사람들도 있고, 늘 지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은 늘 반토막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차이입니다.  
올림픽의 금메달 후보감들은 다른 선수들과 다릅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운동은 평생 메달과는 거리가 멀지만, 내 스스로 불타는 사람은 금메달과의 거리가 노력하고 수고하는 만큼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아벨과 가인의 차이점은 하나님 앞에서 더 나은 제사를 드림에 있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더 나은 예배의 원인은 우리 각자가 가진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6. 그렇다며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겠습니까?
연약한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은 이 믿음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그냥 살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분의 의를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 된 자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인생으로서 가장 가치가 있고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그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첫째로 사람의 가치는 소유나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가 지향하는 목표가 무엇이냐에 따라 인생은 비교가 되고 그 결과로 차별도 받고 대우도 받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목적을 위해서 내가 어떻게 사는가 하는 방법의 문제입니다.
이 두 가지가 온전하면 그 인생은 최고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가치가 있는 것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대낮에 쨍쨍 내리비치는 태양빛 앞에 한 개의 촛불과 같은 것입니다.
촛불은 수백만 개가 모여도 촛불은 촛불이지 태양을 흉내도 낼 수 없습니다.
이것은 개미가 수 천만 마리 모여도 한 사람의 가치를 따라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서 잠시잠깐 후면 다 썩어지고 떠내려가고 없어질 그런 세상에 목을 메달고 죽도록 고생을 해서, 혹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큰 성공을 거둔다고 하여도,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요, 한 자루의 촛불보다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이 믿음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수고한다면, 촛불 같은 내 인생이라도 하나님은 태양의 빛과 같은 영광으로 바꾸어 주시는 줄 믿습니다.

7.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그런 삶을 산다면 이 보다 더 영광스럽고 큰 성공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고, 죄 가운데 빠져 고통하는 인생을 살리기 위해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희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의 목적이나 그 가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죽을 때 최고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인보다 인간적으로 뛰어났거나 가인보다 더 많은 소유를 가져서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제사를 드린 아벨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언 듯 생각하면 아벨이 최고의 제사를 드린 결과로 느닷없이 의를 덧입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창4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그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을 때 가인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4:5절에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마땅히 열납되어야 할 제사가 무효가 되고, 인정받지 못했을 때 가인은 분노했습니다.
뜻대로 안될 때 죄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타낼 수 있는 반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7절에서 밝히시기를 이미 가인 안에 죄가 얼마나 관영한 상태에 있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가득찼습니까? 이 일로 인해서 자기 동생을 쳐서 죽일 정도였습니다.

8. 가인은 이미 불의에서 꽃을 피우고 있는 살기를 품은 채 그런 삶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힌 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나 바로 이것이 가인이 가진 믿음의 실상이었습니다.
물론 아벨도 이런 상황에서 자유로운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그도 가인의 형제로서 똑같은 죄성을 입고 태어난 인간이요, 똑같은 환경과 조건인 죄 가운데서 살던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시도한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을 사용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가인의 죄성과 그의 분노 그의 정죄 당함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똑같이 죄성에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유혹에 약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벨도 가인이 행한 것처럼, 가인의 갔던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가인은 자기의 감정, 자기 안에 있는 분노와 죄성에 지배당한 채로 하나님께 나아갔고, 그런 상황에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제사가 잘못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분했으면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있는 자리에서도 그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자기감정을 조절하는 기능이 상실될 정도로 분노가 가득 찼고, 그 분노는 시간이 가도 식을 줄 몰랐기 때문에 동생을 죽이고 만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 뜻대로 안되면 대부분 화가 나지만, 아무리 거센 화통도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
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며 감정도 수그러들어야 하는데, 가인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 잘못된 감정이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거절당하고 말았고, 그 분노와 복수심으로 아벨을 쳐서 죽였고 그것이 마침내 주위 모든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9. 사도바울이 평소에 늘 고민하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롬7장에 보면 내 안에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욕은 있지만, 그것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끌어내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능력이 없음을 한탄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어디서 해결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롬8:2) 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바울은 믿음을 사용한 것입니다.
아벨도 가인과 같은 죄성을 가진 존재였지만 이 믿음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실 만한 제사를 드릴 수가 있었고 이것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바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에게도 자식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말씀에 순종해서 아벨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그런 의로움이 제사를 통해서 나타남으로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아벨이 하나님께 드린 더 나은 제사는 인간의 힘으로나 우리의 그 어떤 희생으로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죄성을 가진 육신을 입고, 또한 죄가 관영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믿음을 사용할 때 우리는 더 나은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줄 믿습니다.
믿음으로 살면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뿐 아니라 영육간에 면류관도 얻고 축복의 삶을 사는 줄 믿습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내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이 믿음을 사용하면, 우리는 더 좋은 관계, 더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을 사용하면 우리는 더 아름답고 감동을 주는 인격도 만들 수 있습니다.
2017년도를 믿음으로 나아가고, 하나님이 주신 이 믿음을 사용하면 우리도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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