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20.올해는 감사가 있습니까?(시116:12-19)
[성경본문] 시편116:12-19개역개정
12.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13.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14.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15.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16.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17.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8.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그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지키리로다
19.예루살렘아, 네 한가운데에서 곧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지키리로다 할렐루야제공: 대한성서공회
올해는 감사가 있습니까?(시116:12-19/2016.11.20. 추수감사절)
1. 옛날에는 여자들이 결혼하기 전에 신부수업을 받았습니다. 남자들도 성장하면서 칼을 쓰는 무사도를 배우고, 귀족들은 제왕학을 배웠다고 합니다.
한국의 신라시대에는 화랑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빼어난 미녀들을 뽑아서 만들었지만 서로 시기 질투로 모함하고 죽이는 바람에 없어졌다고 합니다. 여자들이 더 무섭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귀족출신의 뛰어난 용모와 두뇌를 가진 남자들을 모아서 만들었더니 국가에 큰 공을 세우는 무사 집단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들이 국가가 필요한 인재감인지 가늠하기 쉽지가 않았기 때문에 그들끼리 자유롭게 행동하게 만들고는 그 행실을 보고 국가의 인재로 등용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화랑도는 첫째로, 위로는 국가에 충성하고, 아래로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고,
둘째는, 대의(大義)를 존중하여 의롭지 못한 일에는 죽음으로 저항하고, 셋째는, 병석에 누워서 죽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나라를 위해 용감히 싸우다가 죽는 것을 명예로 여기며, 넷째로, 전장에서 물러서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적에게 패하면 자결할지언정 포로가 됨을 수치로 알았다고 합니다.
사람의 가치와 태도는 그 사람의 인격이나 성격이나 삶을 통해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사도를 배우고, 매너를 익히고, 심지어 연회나 식사 때에도 예절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배움으로 자신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우월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그렇고, 사물을 보는 눈이나 태도도 내가 배우고 훈련받고 생활한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바라보는 가치관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2. 이번에 한국에서 수능시험이 평소보다 어렵게 나와서 자녀들을 힘들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문제는 이 어려운 시험을 치루고 난 후의 수험생들의 반응이 문제였습니다.
많은 자녀들이 하는 말이 시험이 어렵기 때문에 자기는 망했다는 것입니다.
수능시험이 인생에서 중요한 고비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시험 한 번 잘못 보았다고 망했다는 말을 할 정도라면 이 세상을 살아갈만한 자격이 없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금수저니 흙수저니 헬 조선 같은 말은 전부 사람의 정신을 파괴하는 언어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어떤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까?
우리가 흔히 인격자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사물이나 사건이나 사람에 대하여 좋은 반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좋은 반응,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시편기자가 오늘 본문에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12절에 보니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였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 간구하거나 요구하거나 떼를 쓰는데 이력이 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내 원하는 것이 응답이 안 될 때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이 습관화되었습니다.
내 뜻대로 안된다고 실망하고 원망하고 낙심한다면, 이 사람은 수능시험 한 번 잘못 보고 망했다고 하는 자녀들의 말대로 진짜 망한 사람입니다.
3. 하나님이 자녀된 우리에게 여러 가지의 축복을 주셨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축복 한 가지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언어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언어, 즉 말의 축복이 얼마나 엄청나고 큰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도 이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도 하늘 보좌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실 때에 무엇으로 오셨다고 했습니까?
요1:14절에 보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라고 하였는데, 비록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 분도 원래는 말씀 그 자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의 말씀을 우리의 심령에 받아들이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이 곧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인 줄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을 보면 시편기자가 하는 고백이 놀라울 뿐입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삶 위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놀랍고 감사했기 때문에 보답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으로 충만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2016년도의 11달을 돌아보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과연 이 시편 기자처럼 나도 하나님의 은혜에 좀 보답을 해 드려야겠다고 생각합니까?
이런 질문에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올 해는 장사도 안되고, 직장도 떨어졌고, 사고를 만나거나 질병으로 고통하고 있거나, 원하지 않는 어려운 일들이 겹쳐 일어나서 도무지 하나님께 감사할 기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도 시험에 떨어졌으니 창피해서 못 살겠는데 무슨 감사냐 할 수 있습니다.
4. 그렇다면 시편기자는 생각지도 못했던 좋은 일이 일어나고 많은 복을 받아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보답할 마음이 생겼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시편116편은 다윗의 시로 알려져 있는데, 전체 내용을 보면 그의 처한 상황이 상당히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에 보니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란과 슬픔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둘렀다는 것은 삶과 죽음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정도로 고통스러운 상태를 말하며, 스올은 죽은 자가 거하는 처소로 칠십인역에서는 하데스로 번역하고 있으며, 이것은 불신자들의 영혼이 벌 받는 장소로 알려진 곳입니다.
8절에는,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고 했는데, 이것은 영육간에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에서 건짐을 받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들 이외에도 116편 안에서 시편기자가 당하고 있는 고통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정말 우리 표현대로 하면 살맛이 안 나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기자는 고백하기를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13-14) 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음의 고통에서 내 육신과 영혼을 건지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은혜를 입을 때에는 감사하는 마음이 간절해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런 감정은 소멸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하나님을 향해서는 그런 감정, 그런 감사의 마음이 결코 소멸되어서는 안되는 것은, 그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어 희생하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고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5. 제가 이 교회를 개척하고 매달 지불하는 월세 회당비가 없어 고민할 때, 친구도 형제도 교인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그들의 삶도 한결같이 힘들고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하나같이 손가락으로만 밀어도 쓰러져 버릴 것 같은 그런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32년의 세월을 보냈으니 이것이 누구의 은혜입니까?
여러분들은 누가 도와주고 힘이 되어줘서 망하지 않고 오늘 여기에 이른 것입니까?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줄 믿습니다.
시편기자도 우리와 같은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그런 체험이 있기 때문에 고난 중에라도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넘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의 성경적인 배경 보다는 역사의 현장에서 얻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대한 감사로 인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1558년 영국에서 엘리사벳 1세가 여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메리라는 여왕이 있었는데, 그녀의 반종교개혁으로 인하여 5년 동안 신교도에 대한 탄압으로 많은 개신교 신자가 피 흘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녀의 별명이 피의 여왕이었는데 한 마디로 신앙의 암흑기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메리 여왕의 몸에 알 수 없는 악창이 나기 시작했고, 그것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을 받다가 저주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숨어 있던 엘리사벳이 나타나 처녀의 몸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회복했지만 종교에 대해서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로마 가톨릭도 개신교도 아닌 중립적인 정책을 사용했기 때문에 여기에 크게 실망한 개신교는 또 다른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1603년에 엘리사벳1세 여왕이 북쪽의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를 영국 왕위로 추대한다고 유언을 하였고, 그가 그녀를 뒤이어 국왕이 되자 교회는 왕의 통치권 아래 복종을 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교회의 지도자들의 직분도 왕이 임명하게 되었습니다.
6. 결국 청교도의 일부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영국을 떠나 네덜란드에 정착했지만, 그곳에서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불가항력적 은혜에 대한 신학적 대립으로 인해, 11년 후에 다시 배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 1620년 11월21일에 미국 동쪽의 프리마우스 항에 도착했습니다.
그 해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으로 인해 어린아이를 포함한 102명 중에 44명이 사망했고, 그 이후로도 폐결핵이나 영양실조로 계속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했고 인디언의 위협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해에 옥수수를 재배해서 인디언들을 초청해서 함께 잔치를 벌이면서 하나님께 감사했던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이 된 것입니다.
지금도 청교도들이 상륙했던 푸리마우스 항의 언덕에 가면 기념비가 서 있다고 하는데, 그곳에는 “너희 조상들이 어려움 속에서 성취한 것들을 비겁하게 포기하지 말라” 고 씌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베푸실 때 늘 역경을 통해서 부어주시는 분입니다.
대통령을 뒤에서 조종하던 사람의 딸이 실력도 없으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업고 일류 고등학교를 나오고, 일류대학교에도 들어갔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박탈당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고난도 희생도 없이 성취한 것들, 특히 불법으로 얻은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드러나고, 시간이 지나면 다 무너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부러워하면 똑같은 사람이 될 뿐입니다.
진정한 성공을 위해서는 그 가치에 어울리는 땀을 흘리고 희생을 쏟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때, 내 인생이 비겁해지지 아니하고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으며, 사람들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도 인정받는 줄 믿습니다.
7. 사도바울은 자신의 편지에서 무려 46번을 반복해서 감사한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고후9:15절에는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육신의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고후9:10).
자신을 위해서 천국에 예비된 영광을 바라보고 감사했습니다(9:11-14).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는 유다의 여호야김 왕 때에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때 왕은 정치적으로 애급을 등에 업고 왕이 되었기 때문에 반 바벨론 정책을 쓰게됨으로 늘 나라가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은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함으로 백성들은 빈궁과 낙심 속에서 신음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 하박국 선지자의 외침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에게 빈궁과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어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자고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분의 인자하심과 그 분의 의로우심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믿었고, 그 분의 주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8. 오늘 우리가 주어진 환경과 조건과는 상관이 업이 이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라는 이런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최고의 은혜와 최고의 복을 받은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다니다 보면, 안전벨트를 매는데 이유가 무엇입니까?
위험하니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주행 할 때에도 반드시 안전벨트를 매어야 합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벨트를 풀고 자유롭게 비행기 안을 다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도 늘 불안하고 힘들고, 기쁨이 없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비행기나 신앙생활은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안전하고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늘 낮은 곳을 다니면 남의 실수나 잘못만 보게 되고 그 사람의 발바닥 밖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쁨도 감사도 찬양도 없고 불평 원망 낙심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우리의 잘못된 신앙의 수준을 올리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위로 올라가는 유일한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이 시편기자의 고백대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에 고백하기를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고 했으니, 바로 이 고백과 감사가 오늘부터 우리 가운데 풍성해지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이 지난 1년 동안 나와 내 가정과 자녀들과 직장이며 사업 위에 내리신 모든 은혜에 감사할 때, 2016년도는 최고의 해가 되며, 2017년도는 더 놀라운 축복으로 우리의 삶을 채울 수 있는 줄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