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8.21.바벨론으로 가는 길(열왕기하 25:13-30)
[성경본문] 열왕기하25:13-30개역개정
13.갈대아 사람이 또 여호와의 성전의 두 놋 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 성전의 놋 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14.또 가마들과 부삽들과 부집게들과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으며
15.시위대장이 또 불 옮기는 그릇들과 주발들 곧 금으로 만든 것이나 은으로 만든 것이나 모두 가져갔으며
16.또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받침들을 가져갔는데 이 모든 기구의 놋 무게를 헤아릴 수 없었으니
17.그 한 기둥은 높이가 열여덟 규빗이요 그 꼭대기에 놋 머리가 있어 높이가 세 규빗이요 그 머리에 둘린 그물과 석류가 다 놋이라 다른 기둥의 장식과 그물도 이와 같았더라
18.시위대장이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성전 문지기 세 사람을 사로잡고
19.또 성 중에서 사람을 사로잡았으니 곧 군사를 거느린 내시 한 사람과 또 성 중에서 만난 바 왕의 시종 다섯 사람과 백성을 징집하는 장관의 서기관 한 사람과 성 중에서 만난 바 백성 육십 명이라
20.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그들을 사로잡아 가지고 립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21.바벨론 왕이 하맛 땅 립나에서 다 쳐죽였더라 이와 같이 유다가 사로잡혀 본토에서 떠났더라
22.유다 땅에 머물러 있는 백성은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남긴 자라 왕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가 관할하게 하였
23.모든 군대 지휘관과 그를 따르는 자가 바벨론 왕이 그달리야를 지도자로 삼았다 함을 듣고 이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느도바 사람 단후멧의 아들 스라야와 마아가 사람의 아들 야아사니야와 그를 따르는 사람이 모두 미스바로 가서 그달리야에게 나아가매
24.그달리야가 그들과 그를 따르는 군사들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너희는 갈대아 인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살며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가 평안하리라 하니라
25.칠월에 왕족 엘리사마의 손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이 부하 열 명을 거느리고 와서 그달리야를 쳐서 죽이고 또 그와 함께 미스바에 있는 유다 사람과 갈대아 사람을 죽인지라
26.노소를 막론하고 백성과 군대 장관들이 다 일어나서 애굽으로 갔으니 이는 갈대아 사람을 두려워함이었더라
27.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왕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이월 그 달 이십칠일에 유다의 왕
28.그에게 좋게 말하고 그의 지위를 바벨론에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지위보다 높이고
29.그 죄수의 의복을 벗게 하고 그의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양식을 먹게 하였고
30.그가 쓸 것은 날마다 왕에게서 받는 양이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제공: 대한성서공회
바벨론으로 가는 길(열왕기하 25:13-30/2016.8.21.오전)
1. 1998년에 세상을 떠난 일본의 구로자와 아끼라(黒澤明)라는 영화감독이 있습니다.
라생문(羅生門)이나 칠인의 사무라이(七人の侍), 난(乱) 등 다이내믹한 영상미와 인간미 넘치는 무수한 명작을 남겼으며, 지금도 그가 남긴 작품들은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을 정도입니다.그런데 그가 평소에 하던 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은 우리가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어떤 고생을 겪었는지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다만 스크린에 비쳐진 것만 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볼 때 결과만 따질 뿐, 사건이나 사물의 어떤 원인이나 과정에는 곁눈질도 하지 않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지금 리우에서 열리고 있는 31회 올림픽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수들이 작게는 수년에서부터 시작해서 10년, 20년의 세월 속에 생명을 깎아내는 훈련과 인고를 통해 인간한계에 도전하는 그런 힘과 기술을 발휘하고 있지만, 올림픽이라는 무대를 보는 세상의 시선은 오직 승자에게만 주어지는 메달에 있으며, 그 메달 중에도 금메달에 더 열광하고 오직 그곳에만 집중할 뿐입니다.
그리고는 올림픽이 끝나고 나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승에 대한 그 감격과 찬사와 관심은 점점 희미해지다가, 다음 올림픽이 다가오면 세상은 지난 우승자들의 영광을 되새기기 보다는, 새로운 승자를 기다리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올림픽이라는 무대를 밟기 까지 어떤 길을 걸어왔으며, 승리의 월계관을 향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문사의 논설위원은 올림픽의 금메달을 3달 만에 녹아 없어지는 아이스크림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2. 열왕기서는 표면적으로 보면 중동지방의 한쪽에 자리 잡은 이스라엘이라는 조그만 국가의 역사요 유대인이라는 아주 작은 민족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거의 관심도 가지지 않는 이 역사에 집중하고 남북 왕조의 역사에 관심을 쏟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배후에서 인도하시고 도우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여호와가 곧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요, 우리를 자녀삼기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 십자가에 희생하도록 만드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보살핌을 받던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손에 벌써 망했고, 남아 있던 남왕국 유다나라도 바벨론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의 교만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고, 인간의 욕심이 우상숭배와 온갖 죄와 불법에 빠지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멸망은 스스로 복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재앙과 저주를 불러오는 죄의 결과를 자초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유다 왕국의 멸망을 보면서 그들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분이 순종하는 자에게 축복을 내리시고, 불순종하는 자에게 징계를 내리시면서 그들을 새롭게 하시는 은혜의 역사에는 곁눈 짓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행위로 말하면 망해도 당연하고 고통과 저주 가운데 빠져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열왕기서를 마치면서 느끼는 것은 남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는 여호와는 회복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3. 선지자 예레미야는 범죄하고 그 죄의 대가로 망해가는 유다왕국을 향하여 거듭 선포하기를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했습니다. 그것만이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범죄한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나라가 망해서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도, 같은 포로의 신세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결말이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유다왕국의 임금이라도 끝까지 대항하는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히고 아들들이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는데 비해서, 본문 27절 이하에 보니, 여호야긴 임금은 나중에 옥에서 나와서 바벨론왕의 호의를 입었는데, 바벨론에 사로잡혀온 다른 나라의 왕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좋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다니엘과 그 세 친구도 벌써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자신들의 신앙의 절개를 지킬 수 있었고, 다니엘은 세계를 통치하는 절대 강국 바벨론의 총리가 되었고, 느브갓네살과 바벨론 제국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벨사살과, 메데 왕국의 다리오와 고레스 임금을 섬기면서 그들의 절대적인 총애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서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바벨론에 나라가 망해도 그것이 선민 유다 왕국의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의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도 그것이 하나님 백성으로서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창세기를 통해서 애급의 국무총리에 오른 요셉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 강제로 끌려간 포로의 신분이었지만, 그곳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어떤 경우에는 자국에서 행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큰일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디에 있었던지, 무엇을 하던지 여전히 하나님 중심의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우선으로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4. 그러므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일 줄 몰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본문 22절 이하를 보면 바벨론이 선지자 예레미야의 친구인 그달리야를 유다 총독으로 세웠지만, 유다 왕가 출신의 이스마엘이 그를 암살하여 끝까지 대적 바벨론의 원수 노릇을 했습니다.
그 때, 이스마엘과 함께 한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억지로 애급으로 끌고 가서 결국에는 돌려 쳐 죽이고,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그의 시체를 끌고 다녔다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장소나 시기나 환경이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가는 그 곳에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가 아닌가? 오직 그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의 말대로 유다가 사는 길은 바벨론으로 가는 것 뿐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바벨론은 범죄한 유다를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바벨론에서 유다 나라를 새롭게 하시려고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예언대로 그 나라에서 70년만 기다리면 새로운 역사가 일어날텐데, 교만하고 완악한 사람들은 그것도 참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불순종이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결국에는 고난과 심판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울이 바리새인으로서는 열심히 있었지만, 그 열심히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5.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내가 이해할 수 없으며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라도, 일단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기다리면, 좁은 길도 생명의 길이 되며, 험한 길도 진리의 길이 되며, 가시밭길도 천성에 이르는 길이 되는 줄 믿습니다.
정말 유다 나라가 멸망했습니까? 자기 힘과 자기 지식을 믿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오,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임을 믿으면 바벨론에게 유다가 망한 것이 아니라, 유다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다윗왕국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가?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창49:10)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라면 유다가 바벨론 때문에 망할 수 없으며, 유다가 연약하기 때문에 영영 무너질 수도 없으며, 그들의 죄 때문에 유다가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으로 가는 이 길은 결코 망하는 길이 아닙니다.
이 길은 도리어 새로운 길이요, 하나님이 유다를, 온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시기 위한 수단으로 바벨론을 택하신 것뿐인 줄 믿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머리 나쁜 인간들이 부러진 지팡이와 같은 애급을 의지하면서 계속해서 바벨론에 대항하여 독립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삼상15:22)다는 선지자 사무엘의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것이 수치요 고통이요 두 번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벨론으로 가는 이 길이 인간의 교만과 욕심과 우상숭배의 굴레를 벗어버리는 것이라면, 부끄럼과 고통을 무릅쓰고 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6.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십자가는 저주와 수치와 죽음의 고통이 기다리는 가시밭길이었고, 골고다로 향하는 이 길은 분명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는 결딜 수 없는 부끄러운 길이었지만, 그 길은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열어주는 구원에 이르는 길이었고, 고통으로 가득한 길처럼 보이지만,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 마침내 그 길은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으로 가는 이 길도 언약의 백성들만이 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이요 다시 살며 다시 회복하는 복된 길인 줄 믿습니다.
그곳에서 언약의 말씀을 기억하고 70년만 기다리면 새 길이 열리고 새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바벨론을 심판하신 후에, 바사왕을 사용하여 자기 언약의 백성을 구원하시기로 미리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힘을 빌려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그래서 스룹바벨과 느헤미야와 에스라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페르시야 시대에는 수산궁에 유대인을 위하여 누구를 세우셨습니까?
모르드개의 조카 에스더 왕비입니다.
하나님은 에스더를 통해서 죽음의 위기에 빠진 유대인을 구원하신 것을 에스더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7. 그리고 우리가 열왕기서를 마치면서 간과해서는 안되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인간이 욕심에 끌려 범죄한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입니다.
헛된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며 그곳에 절하고 소망을 두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이며 불쌍한 일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어리석은 행위 때문에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철저하게 이방인의 손에 유린당하고 말았습니다.
왕하24:10절 이하와, 본문의 13절 이하를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거룩한 것으로 구별하여 드린 백성들의 물질이 어떻게 되었으며 누구의 손에 넘어갔습니까?
24:13절에는 성전과 왕궁이 다 파괴당했다고 했으며, 13, 14, 15, 16절 그리고 17절 까지 보면 성전에 있는 모든 귀한 것들을 다 바벨론으로 가져갔다고 했습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성전이 그 백성을 지킬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성전이 사람을 거룩하게 하거나 의지할 힘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완벽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고 재물을 의지하고 이런 것을 자랑하며 자기 힘을 믿는 사람은 다 이와 같은 결과를 맞이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지키시고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줄 믿어야 합니다.
죄를 범한 인생이라도 사는 길이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죄를 이길 수 있는 보혈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8. 오늘 우리의 눈에 무엇이 보입니까? 우리는 지금 무엇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어디에 소망을 두고 있습니까?
내 형편이 내 삶이 비록 부끄러워도 실망하지 마시고 이 부끄러움과 연약함 속에서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만을 의지하고 그에게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렘50장에 보니 죄를 범하여 망해버린 이 유다를 가리켜 여전히 내 백성 나의 소유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노략하고 고통하게 만드는 나라와 민족들은 다 심판할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50:19절에 보니 “이스라엘을 다시 그의 목장으로 돌아가게 하리니 그가 갈멜과 바산에서 양을 기를 것이며 그의 마음이 에브라임과 길르앗 산에서 만족하리라” 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바로 그 때가 되면, 이스라엘의 죄악은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렘50:20절에 보니 그들을 다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내가 원치 않는 길, 바벨론으로 가는 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망하는 길도 아니고, 소망이 없는 길도 아닌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려고 잠시 고난 가운데 두심으로, 우리로 회개하게 하시고 다시 거룩한 백성으로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여 영원한 복을 받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