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7.13.무엇을 바랄 것인가(시편42:1-5)

[성경본문] 시편42:1-5개역개정

1.제이권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3.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무엇을 바랄 것인가(시편42:1-5/2014.7.13.오전)
1. 지난 주간에 한국에 가서 두 번째 책을 출판하고 왔습니다.
책을 작고 가볍게, 그리고 싼 가격으로 책정 한 것은, 부족한 설교지만 많은 사람들이 읽고 은혜를 받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여기까지 도와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주어진 시편 42편은 그 다음에 나오는 43편과 하나로 되어 있는 노래로서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간절히 그 분을 사모하던 노래였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42편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이 이토록 하나님을 사모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인간은 연약하고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자기 백성을 돕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현실 속에서 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루를 살면서 과연 얼마만큼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세상이 우리를 그렇게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온갖 염려와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세상의 많은 즐거움들이 우리를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만들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본문의 시편 기자의 경우는 고통 속에서 부르짖지 아니하면 안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의 조롱을 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2. 시편 기자의 현실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이 이방 우상을 숭배하는 바벨론에게 점령당하고, 성전은 파괴되고 백성들은 먼 이국땅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으니 이런 상황에서 원수들의 조롱이 아니라도, 제 스스로도 과연 하나님이 어디계시며 왜 우리를 이렇게 대우하시는가 하고, 한두 번쯤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본문 3절에 보니 "사람들이 종일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고 시편 기자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하나님의 도우심이 먼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대적들의 조롱과 공격이 더욱 치열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아무리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도 처음에는 먹을 수도 없고 잠을 잘 수도 없습니다.
석 달 전에 일어난 세월호 침몰 사건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하루하루의 양식을 눈물로 채웠습니다.

3. 그런데 저는 최근의 우리의 영적인 환경과 현실을 보면서 과연 우리의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가 하는 소리가 나올 만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파괴하려는 대적들은 많고 저들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강해져 가는데, 참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신앙은 하나 되는데 실패하고 미움과 아귀처럼 다툼으로 서로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한국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기가 막힌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정통신앙이라고 자부하면서도 이단에 빠진 사람들에게 도리어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열심은 그들의 상대가 안 되고, 전도의 전략에서 밀렸고, 무엇보다도 우리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신앙고백으로 하나 되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대형교회로만 몰리면서 개척교회에 더 이상 사람들이 가지 않으니 교회 개척은 엄두도 못 내고, 한국의 90% 이상의 목회자들이 이미 빈곤층으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대학과 대학원에서 7년 동안 전문분야에서 배우고 훈련을 받은 고급인력들이 사회의 지도층이 아니라 구제대상으로 전락했다는 것은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잘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4. 이런 현실 속에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을 볼 때 무엇이라고 할 것 같습니까?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바로 이것입니다.
물론 예수 믿으면 다 성공하고 형통하고 잘 먹고 잘 산다는 말은 아닙니다.
옛 선지자들과 순교자들은 형통은커녕 한결같이 고난과 멸시와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으며, 네가 믿는 하나님을 보여 주고, 네 신앙을 증명해 보라고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이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 산상에서 바알 섬기는 선지자 450명과 대결하여 그가 믿는 하나님을 불로 응답하시는 분으로 모든 이스라엘 앞에 똑똑히 보여 주었고, 3년 반 동안 가뭄으로 죽은 땅처럼 된 이스라엘에 비를 내려 모든 생명을 소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시느냐 이것입니다.
하나님 스스로 이스라엘을 향하여,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시는"(신32:10) 분이라 하였고, 예수님도 우리에게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고 하셨는데, 과연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체험하며 믿고 있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요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라고, 내가 고난 속에서 조롱과 멸시를 당하고 있을 때, 내가 믿는 하나님을 어떻게 보여 줄 것인가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5. 그런데 우리를 실망하게 만드는 문제가 또 있습니다.
시편 42편 전체를 읽어보면 이 시편기자는 분명히 흔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에서는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사람들의 조롱 소리에 밤낮으로 울고 있으며, 5절에 가서는 자신이 낙심과 불안에 갇혀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만난 하나님, 내게 구원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증거하는 이 일이 그 때의 현실 속에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성도들의 가정에 믿지 않는 식구들이 많은데, 이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들에게 하나님 살아계신 것을 보여 준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주님은 늘 함께 하시며 동행하신다고 약속하셨고, 우리도 그렇게 믿고 살아가지만 그 하나님을 조롱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속이 상해서 울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마음에 평안을 잃고 낙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옛날부터 신자들 가운데도 위선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 만난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  
기도 응답도 없으면서 큰 능력과 확신을 가진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서는 제일 많이 근심하고 낙심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6. 우리는 이런 문제를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이 시편기자처럼 똑같은 대우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왜 너의 아버지의 도움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아들을 외면하시고 그를 죽도록 내버려 두는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했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27:40) 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너는 거짓말쟁이요 가짜요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서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 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마27:42) 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여전히 죄인이요 무능한 자요 거짓말쟁이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도 이런 순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한 번만 축복하시고 기적을 일으켜 주신다면, 내가 평생에 힘써 전도하여도 구원하지 못한 사람들과, 평생 수고한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원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기도가 부족하고 정성이 부족하고 사단이 방해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 믿어서, 신앙이 잘못되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7.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 속에서도 침묵하셨고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거부하셨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사실은 본문을 잘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응답도 없고 능력도 없이 낙심하여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자신이 가진 영적인 근거들에 의하여 자신을 지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이었습니다.
2절과 4절의 말씀을 보면, 시편기자는 백성들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오기 전에 예루살렘에서 성전에 올라가는 것을 기뻐하였고, 그곳에서 감사와 감격에 쌓여 기쁨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며 경배하던 것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모든 상황이 어렵고 사방이 다 막힌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기억해 낸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향한 예배였습니다.
이것은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와서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속에서도 그 때의 예배를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열망을 표현하기를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 하다고 했습니다.
지금 당장 물이 없으면 사슴은 목이 타서 죽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이 사슴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시냇물을 찾는 것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물을 찾으면 살고 찾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이전처럼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영적인 갈망, 목마름 그 자체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아닌가 하는 판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예배하고자 하는 갈망이 있으면 그 영혼은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예배를 위해,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가진 자는 참으로 복 받은 자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예배를 위한 영적인 목마름입니다.

8. 둘째는, 하나님이 베풀어 주셨던 은혜에 대한 과거의 회상입니다.
4절에 고백하기를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으로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고 했습니다.
성도들과 함께 예배하고 찬양하는 이 시간, 이 장소, 이 모습을 두 번 다시 반복할 수 없었을 때 시편기자는 속이 상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함께 동행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백성의 큰 즐거움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기쁨으로 찬양하고, 말씀을 들으면서 함께 공감하고,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성도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의무인 동시에 그 자체가 기쁨이고 축복이고 영광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향한 예배권을 빼앗으려 했지만,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4:10) 고 그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시편기자는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며, 그 은혜를 함께 나누면서 함께 기뻐했던 그 사람들과 그 공동체를 사모하면서, 더 이상 그런 관계를 가질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슬퍼하고 속상해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된 교회로 나와서 성도들과 함께 예배할 수 없을 때, 속상하고 안타까운 그 정도의 마음이 아니라,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기다리는 있는 그 장소에 갈수가 없을 때, 그 때의 그런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부모의 눈을 피하여 창문을 뛰어 넘어서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달려가고자 하는 그런 마음, 그런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또한 사랑하는 자식이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려 달라고 몸부림칠 때 그곳에 달려가서 구원의 손길을 주지 못할 때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자신의 목이라고 베어서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자 하는 바로 그런 부모의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간절함과 갈망이 시간이 갈수록 우리 가운데서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9. 셋째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신뢰하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반드시 그 문제에 집중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다 보면 나는 점점 작아지고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증폭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온전한 해결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이라고 윽박지르고, 네 하나님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조롱하는데. 그 때 시편기자가 결심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절대로 이런 것이 문제의 해결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본다고 무슨 도움이 되며 상황이 바뀔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스스로를 향해서 5절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고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계시면서, 자기를 찾는 자들을 인도하시고 도우시고 축복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기다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롯유다는 늘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 한심했고, 답답했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하루 빨리 로마정권을 몰아내고 이스라엘 가운데 메시야 왕국을 세우는 것인데, 예수님은 병이나 고치고 죄인들과 친구가 되어 잡담이나 하면서 사회적으로 쓰레기 같은 사람들을 돌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0. 가롯유다는 하나님의 뜻 보다는 제 생각을 앞세웠기 때문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무덤 속에서도 하나님 아버지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기다림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도 고난 속에 있는 성도가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그렇게 말했을 때에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 어떤 특별한 행동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십자가 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기다릴 줄 아는 신앙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원수를 대적할 수 없으며, 우리의 지혜로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할 때 그들이 원하는 답을 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을 바꾸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백 마디의 말로 설득이 되거나, 증거가 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과거에 내 삶 속에서 구원과 은혜로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을 우리는 기다릴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조롱과 멸시 속에서, 그들이 원하는대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바른 대답입니다.

그리고 조롱과 눈물과 탄식 속에서 유일한 소망이요 힘이 되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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