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2.16.가롯 유다의 선택(마태복음 27:1-10)
[성경본문] 마태복음27:1-10개역개정
1.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3.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가롯 유다의 선택(마태복음 27:1-10/2014.2.16.오전)
1. 인간의 생애는 선택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태어나서 무덤에 들어갈 때 까지 선택하며 살아야 하고,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시 잠자리로 되돌아올 때 까지 하루의 일과도 선택의 연속입니다.
최근에 성도 한 분이 돌아가셨는데, 마지막 유언 중에 하나가 시신은 소각하고 장례식은 가족장으로 하며 부조금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그가 결정한 인생의 마지막 선택입니다.
2.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조카 롯은 같은 장소에서 살았지만, 소유가 점점 많아지자 더 이상 그들이 함께 동거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매일 눈만 뜨면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도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짐승에게 먹일 물이나 꼴의 우선권 문제로 다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죽하면 아브라함이 롯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창13:8) 고 했습니다.
그러나 싸우지 말자고 결심해도 한 번 일어난 문제는 해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무엇입니까? 서로 헤어지는 것입니다.
그 때 아브라함과 롯이 선택한 것이 무엇입니까?
롯은 온 땅에 물이 넉넉하고 풍요로워 보이는 소돔과 고모라 성이 있는 요단들을 바라보고 그 곳을 택하여 동쪽으로 나아갔고, 아브라함은 그 반대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조카 롯과 헤어진 후에 마음에 상심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위로하시고 큰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롯은 소돔 성으로 들어갔고 얼마 후에 하나님은 죄악이 관영한 소돔 성을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려 그 성과 하나님의 동산처럼 아름답고 풍요로웠던 그 온 들과 거민들까지 다 멸하였고, 롯은 겨우 자신과 두 딸의 생명만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선택이 잘못된 것입니다.
3.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잘못된 선택이 가롯 유다를 통해서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다는 마26:14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을 제사장들에게 넘기기로 하고 이미 은 30냥을 그 대가로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행동에 대하여 여러 가지 추측을 하고 있지만, 성경은 그 일에 대한 정확한 답을 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21)고 하셨고, 충격과 근심 중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인자는 자기에게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24) 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실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가롯 유다의 배신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니 그는 십자가 구원의 공로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언 듯 들어보면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세상의 모든 논리는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고 사실을 보는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 복음서 같은 것도 있으며, 허버트 크로스니(Herbert Krosney) 같은 사람은 The Lost Gospel(잃어버린 복음) 같은 저서를 통하여 예수님과 유다 사이에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비밀의 약속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4.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역사적인 추리나 뛰어난 문학적인 표현을 통해 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님의 도우심, 즉 성경을 읽는 자를 깨닫게 하시는 조명을 통해서 진리를 알게 되고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만일 유다가 제사장들뿐만이 아니라 예수님과도 어떤 종류의 밀약이 있었다면 왜 그렇게 제 인생의 마지막을 그렇게 비참하게 마감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어떤 비밀이나 사람들의 약속이나 도움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말씀에 대한 순종이 있으며, 이 일을 위해서 성령의 도우시고 인도하심이 있을 뿐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의 공로는 하나님의 예정과 의와 그 분의 거룩하심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나타낼 수 없는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조차도 하나님의 말씀과 예정 앞에서 오직 순종만 있었을 뿐이며, 그래서 예수님은 한평생을 겸손함과 온유로 본을 보이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 가운데서 어떤 일을 행하셨으며, 그 일을 통하여 무엇을 이루셨는가가 중요할 뿐입니다.
5. 사도행전 1:18-19절에 보면,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고 하였고, 이 사건을 온 예루살렘의 사람들이 알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미 구약 스가랴서 11:12-13절에서 가롯 유다가 은 30냥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정죄됨을 보고 유다가 스스로 뉘우친 것이나, 그래서 이 일을 되돌리려고 애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자신이 무죄한 자의 피를 팔았으니 이것은 잘못된 것이요, 내가 잘못 선택한 결과요 그 분은 죄가 없으니, 우리의 모든 거래는 없는 것으로 하고 모든 것을 되돌리자는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한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스스로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무죄성을 주장했고, 그 대가로 자신이 받은 은 30냥을 그들에게 돌려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고 거부했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주장이 하나도 용납되지 못함을 보고는 더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나중에는 그 돈을 성전 바닥에 던져 버리고는 나가서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세상이 비정한 것은 이 가롯 유다에 대한 종교지도자들의 행위입니다.
유다는 뒤늦게라도 제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과오를 되돌리려고 생각했지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고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고통하고 괴로워하는 유다에게 더 심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무죄한 피에 대한 죗값은 우리와는 상관이 없으니 네가 당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유다가 던진 은 30냥은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이 성소에 넣어두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여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습니다.
그들이 참된 종교지도자들이요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었다면 지금 유다에게 일어난 문제가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고통의 문제에서 건져낼 것인가를 고민했을 것입니다.
6. 이런 환경 속에서 유다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살로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견딜 수 없는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엄청난 사건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과 어리석음을 통감했기 때문입니다.
3절에 보면 가롯 유다가 "스스로 뉘우쳤" 다 했습니다.
이것은 원어로 "메타멜로마이"로 바꾼다는 의미의 "메타" 와 관심을 가진다는 의미의 "멜로마이" 의 합성어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후회한다는 의미입니다.
수난과 모욕을 받으며 정죄를 받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는 유다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의 마음이 어떤 사건이나 문제를 놓고 후회를 한다고 해서 그 죄의 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후회는 자신의 생각은 바꿀 수 있어도 자신이 지은 허물이나 죄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은 유다가 택한 선택의 한계입니다.
그가 예수님에 대한 배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견딜 수 없도록 괴로워하고 고통한 것은 사실입니다.
뒤늦게라도 후회한 것은 불행 중에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유다가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선택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의 눈물의 회개가 아니라 스스로의 생명을 끊은 것입니다.
7. 솔직히 말해서 예수님을 배신한 것은 유다만의 일이 아닙니다.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고 맹세를 했지만, 전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한 번도 아니고 3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베드로의 행위나 유다의 행위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똑같은 배신이요 똑같이 예수님의 마음을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이 두 사람이 똑같은 배신의 길을 갔지만, 그들이 나중에 선택한 행동이 그들의 가는 길을 영원히 갈라놓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닭 울음소리를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통곡하며 회개의 눈물로 생각만 고친 것이 아니라 가는 길을 돌이켰지만, 유다는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자살이라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 기독교의 신앙이 세상 사람들처럼 배신에 대한 대가를 치루고, 그 대가가 스스로의 목숨까지 끊어버려야 할 정도로 인간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기독교 신앙은 생명의 종교요 은혜의 종교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자신들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
이유는 인간에게는 그만한 능력과 가치가 스스로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짐을 대신 져 주신 것입니다.
마11: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약속해 주셨으며, 그는 말씀대로 십자가 위에서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과 죄와 허물과 질병과 가난과 모든 고통과 저주와 영원한 죽음의 문제까지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해결해 주신 줄 믿습니다.
8. 문제는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 다니며 제자의 길을 걸었던 가롯 유다는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죄와 실패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다의 행동은 세상적으로 보면 용기 있는 사람의 행동일 수도 있으며, 많은 사람들의 동정심과 지지를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유다의 선택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그런 신앙심에서 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으로 인하여 양심의 가책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좋은 현상입니다.
그러나 이 양심의 가책을 좋은 현상으로만 머물게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용서를 구하며 더 좋은 방법과 길을 얻기를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유다가 선택한 자살은 성경에서 분명한 언급은 없는 것 같습니다마는,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생명은 사람이 주관할 수 있지만,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 생명 속에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좌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살은 더 이상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것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요, 인생이 청지기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중대한 영적인 도발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부여 받은 것이요, 그러므로 생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이 사명에 충실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인 줄 믿습니다.
9. 가롯 유다가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처음 따를 때 이런 결과가 오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 적어도 대제사장으로부터 은 30냥을 받고 예수님을 팔기로 약속했을 때에도 이런 결과가 오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도 못했을 것입니다.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과 함께 빵 그릇에 손을 넣는 순간에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나중에 당할 이런 비참한 결과를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 번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 눈이 어두워지니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일에 그가 베드로처럼 통곡하며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더라면 그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한 번 쏟은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유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쏟은 물도 다시 주워 담게 하실 수 있는 것은 그가 창조주 하나님이시오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행하신 일들을 통하여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지, 우리가 스스로 무엇을 행함으로 구원받고 새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 이외에 그 어떤 공로나 행위를 인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 는 이 선언이 오늘 우리를 영원히 살리는 줄 믿습니다.
이러한 구원의 은혜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연약함과 부끄러움은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그 분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