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7.28.순교자의 피(마태복음23:29-39)

[성경본문] 마태복음23:29-39개역개정

29.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30.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32.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33.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35.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37.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38.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39.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순교자의 피(마태복음23:29-39/2013.7.28.오전)

1. 두란노에서 출판되는 생명의 삶 8월호에 보니, "산 예수 산 신앙" 이라는 제목으로 돌아가신 김준곤 목사님의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 중에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순교 속에 살아계십니다. 집사 스데반이 최초로 순교한 이후 교회의 부흥이 일어날 때 마다 순교의 피가 흘려졌고, 복음이 한 나라와 지역에 들어갈 때마다 순교의 피를 타고 전해졌습니다. 특히 주후 64년부터 313년까지 기독교 박해가 극심했던 로마 시대에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부인해서 목숨을 건지든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든지 선택해야 했습니다. 로마 전역에서 십자가에 달리거나 화형을 당하거나 짐승에게 찢기며 수십만 명이 순교했습니다. 이천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순교한 사람을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들 모두 살아 계신 예수님을 위해 순교했습니다. 그들의 피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것만이 순교가 아닙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세상 사람들에게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는 것도 산 순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순교의 피가 구약 성경 속에 나타난 선지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기독교 2천년 역사를 통해 오늘 우리의 시대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특히 교회의 부흥이 일어날 때 마다 반드시 순교의 피 흘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선지자들과 믿음의 사람들이 흘린 수많은 피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문을 읽으면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피 흘림을 당한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잘못했기에 죽임을 당하고 못 박힘을 당하고 채찍질과 박해를 받으면서 피를 쏟아야 했단 말입니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이 땅에 참된 평화가 오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해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겠습니까?

2. 그런데 또 한 가지의 의문점을 떨쳐 버릴 수가 없는 것은, 지금도 매년 지구촌의 여기저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거나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 한다는 이유만으로 수만 명이 죽임을 당한다고 하는데, 왜 우리가 살고 있는 일본이나 한국에서는 순교의 소식이나 박해받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기가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미 복음화가 되어서 그렇습니까?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존경하고 부러워하거나 반대로 불쌍하게 보여서 동정하고 있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우리 시대의 신앙이 이미 세상에 동화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이 사람들의 시대의 신앙과 우리 시대의 신앙이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요한15:18-20절에 보니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 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고 하셨고,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9절에 보니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들을 포함하여 수만은 믿음의 사람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고 박해를 받아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해졌습니다.
본문 30절을 보면 이 순교의 피가 예수님이 오셔서 갑자기 시작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3. 신구약 성경을 통해 일관되게 흐르는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피에 관한 내용입니다.
구약에서는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제물로 드려진 짐승들이 대신 피를 흘려 죽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양을 잡아 피를 흘렸습니다.
그런데 레위기 16장에 보면 대속죄일에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수 염소 두 마리를 드렸습니다.
제비를 뽑아 그 중에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하여 속죄제의 제물로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살려 두었다가 속죄제가 끝나면 제사장이 이스라엘이 범한 모든 죄를 그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전가한 후에 아무것도 없는 무인광야로 보냅니다(레16:7-10, 21).
그런데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 염소를 광야로 끌고 간 사람이 두 번 다시 사람 사는 곳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절벽에 가서 밀어 버린다고 합니다.
아사셀에 관한 성경 해석은 여러 가지의 학설이 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한 마리의 염소는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제단에서 피를 흘리고 대신 죽임을 당하고, 다른 한 마리는 죄를 대신 짊어지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완전히 격리를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는 이중 사역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죽임 당하는 염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하고, 쫓겨나고 버림당하는 염소는 하나님의 백성이 두 번 다시 죄의 세력에 사로잡히거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완전히 격리를 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 중에 부르짖는 아들을 버리시고 외면하셨던 것은 그가 대신 짊어진 인류의 죄를 두 번 다시 상관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십자가 위의 예수님이 고통 중에 부르짖는 소리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기 쉽게 하나님은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희생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4. 그러나 피 흘림의 역사는 짐승의 피로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짐승의 피와 희생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수많은 선지자들이 피를 흘리며 죽임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레미야의 경우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이유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결혼을 포기했고, 가족과 동네 사람들과 같은 민족에게 배척당하고 매 맞고 감금당하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함으로 배반자의 낙인이 찍혔고, 예루살렘이 무너진 후에는 애급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살해당하고, 분노한 유대인들에 의해 그 죽은 시체마저 걸레조각처럼 찢겨짐을 당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순교자 져스틴의 기록에 의하면 므낫세 왕에 의해 그 몸이 톱으로 잘려 순교 당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순교의 피는 본문 35절에 기록된대로 의인 아벨이 제사의 제물 문제로 피흘려 죽임을 당한 이후 요아스왕 때에 백성들의 우상숭배를 책망하다가 성전 뜰에서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한 사가랴(대하24:20-22)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대마다 의인들의 피 흘림이 있었음을 예수님이 직접 증거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왜 하나님의 종들이 시대 시대마다 이렇게 피를 흘리며 순교해야만 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마태21장에 보면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가 나오는데, 포도원 주인이 농사지은 것을 받으려고 종들을 보내는데 농부들이 차례로 다 죽여 버립니다.
나중에는 아들을 보내면 죽이지 않고 순종할 줄 알았는데 그 또한 죽이고 포도원은 아예 농부들이 통째로 먹어 버렸고, 분노한 주인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다른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기는 내용입니다.
종들을 먼저 보냈는데 종들이 차례로 죽임을 당하고 마지막에는 아들까지 죽임을 당했는데 이것은 선지자들의 피 흘림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흘림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결국 아벨의 죽음에서 시작한 모든 시대의 선지자들과 의인들의 죽음은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알리기 위한 그림자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5. 우리가 죄 용서를 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죄와는 상관없는 몸으로 살도록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희생을 통해 보여 주셨고, 또한 선지자들의 흘린 피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예고해 주셨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과 그의 사역을 위해 준비한 것처럼, 모든 선지자들과 의인들의 피 흘림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위한 예비적인 피 흘림이었습니다.
피 흘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모든 인류의 죄 문제가 해결되고 그래서 더 이상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희생도, 번제나 속죄제가 필요 없고, 더 이상의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피를 흘려야 하는 이유가 없을 정도로 예수님의 구속 사역은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 스스로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고 말씀하셨고, 사도 베드로도 고백하기를,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 (벧전2:24)심으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짐승이든지 사람이든지 그 누구의 희생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12제자들의 대부분이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초대교회의 스데반의 순교와 사도바울의 순교의 피 흘림이 있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왜 또 다시 피 흘림의 역사가 반복되며, 교회의 부흥이 있는 곳에는 왜 반드시 피 흘림이 있어야만 합니까?
6. 제가 서두에서 우리의 신앙적인 환경이 박해가 없고 피 흘림이 없는 이유를 말할 때 우리의 신앙이 세상에 동화되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했고, 우리의 신앙과 그시대 사람들의 신앙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있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피 흘림은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하실 일을 미리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흘리는 피는 무엇입니까?
우리 시대에 흘리는 순교자들의 피는 무엇이며 그들이 당하는 박해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마태22:37절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 사랑하는 마음이 눈물을 쏟으며 피를 흘리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예수님 사랑하면 생명도 피도 아깝지 않는 법입니다.
예수님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제자의 삶을 살 수 있으며 저절로 충성된 일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점은 바로 이것이 잘 안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교회에 무목 교회가 계속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잘 아는 일본 목사님들은 80대가 되어도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젊은 사람들은 목회자가 되고 싶어도 생활이 안되기 때문에 헌신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활 이전에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피 흘리고 순교하기 까지 예수님을 따르는데 왜 우리는 계산만 하고 앉아 있습니까? 사랑하는 마음이 적기 때문입니다.

7. 마27장에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위를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마26:10)고 칭찬하셨지만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행동을 보고 귀한 것을 허비했다고 생각하고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귀한 것을 예수님의 몸에 붓기는 아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남들이 무엇이라고 하던지 예수님의 몸에 당연하다는 듯이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이 망설임 없이 두려움도 없이 피를 흘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마치 이 여인이 예수님의 몸에 향을 붓는 것처럼 저들은 제자신의 피를 예수님의 몸에 부은 것입니다.
이 시대에 누가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부어드리며, 어떤 사람들이 제 몸의 피를 예수님께 부어 드릴 수 있습니까?
그 답이 누가7:47절에 있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여기서 예수님의 많다 적다는 표현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이고 개인의 내적인 문제입니다.
받은 은혜를 입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별것 아닌 것 같은 작은 은혜도 평생 잊지 않고 감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우리 몸에 쏟은 십자가의 보혈은 적다 많다고 표현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은혜요 값으로 따질 수 없고 그 어떤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나를 위해 쏟으신 보혈의 은혜를 내가 귀하게 여기면 나는 제일 많은 사랑을 입은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나는 적게 용서받은 것입니다.

8.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단 두 단어로 표현한다고 하면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사람에게 생명 보다 더 귀한 것은 없으며, 성경에서 생명은 피에 있다고 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의인의 피를 흘리면 그 피에 대한 보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악인들의 손에 의해 시대 시대마다 순교의 피를 흘려야만 하는 이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지금도 지구촌 어디에선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피 흘려 순교하는 신앙인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늘나라에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제 몸 보다 제 생명보다 더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뜨거움을 제 몸에서 가슴에서 심령에서 확실하게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남의 피를 빨아먹고 남의 피를 흘리기를 좋아하는 그런 흡혈귀 같은 존재가 아니라 제 피를 쏟아 주님을 향한 사랑을 나타내고, 예수님처럼 제 자신의 피를 쏟으면서 주님의 몸 된 믿음의 공동체와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이 시대의 살아있는 순교자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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