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7.14.탐욕이 문제입니다(마태복음 23:16-28)
[성경본문] 마태복음23:16-28개역개정
16.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7.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9.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23.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25.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 탐욕이 문제입니다(마태복음 23:16-28/2013.7.14.오전) 1. 친구 목사님의 말이 승려는 승려 같고 신부는 신부 같은데 웬일인지 목사는 목사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그래서 나는 몇 번이고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제 자신을 살펴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목사가 목사 같지 않다는 것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이것은 단순한 외모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목사로서 추구해야만 하는 내적인 본질에서 벗어났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마태복음 전체를 놓고 볼 때 23장의 말씀은 5장부터 7장까지의 산상수훈과는 정반대의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에서는 복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23장인 본문의 말씀에는 화가 있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경고장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들을 가리켜 천국 문을 막아서서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자들이요 열심히 전도하여 얻은 영혼들을 지옥의 자식으로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23장에서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화 있을전저” 라는 말을 7번 하셨고, “외식한다” 는 말을 6번 반복하셨고, “소경된 자”라는 표현을 5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심기가 얼마나 불편한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을 격려하고 힘을 실어주어야 할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 저주에 가까운 폭언을 퍼 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종교지도자들의 탐심이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죄인이고 연약하고 부끄러운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잊어버리고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직분을 마치 남다른 특권으로 생각하고, 그 직분을 이용하여 제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 시대의 현실을 보고 종교인들의 모습과 우리 각자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경고장과 같은 화가 있겠다는 그 말씀이 우리의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2. 23절을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렸” 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수입의 십일조는 물론이고 정원에 심어 놓은 약초의 줄기까지 세어서 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혹시나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에 착오가 있을까하여 소득의 세세한 부분까지 분류해서 십일조를 드리는데 실수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교인들이 십일조만 정확하게 잘 해도 기본이 잘된 신자로 보고 십일조를 속이지 않으면 신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사실 재정적으로 어려운 교회들 중에 교인들이 제대로 십일조 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교회가 의외로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온전한 십일조, 거짓이 없는 십일조를 드리면 많은 교회들이 자립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어려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욕심 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을 보면 그들이 십일조 생활에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신앙적인 열심도 대단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욕심이요 탐심이 문제였습니다. 종교적으로는 탓할 만한 것이 없는데 문제는 그 사람들 속에 있는 탐심이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 소경이라는 표현을 반복하고 있는데 이것은 탐심이 그들의 눈을 어둡게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16-22절을 보면 이 욕심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가치관도 뒤집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에 생명을 걸고 사수를 하고, 정말 중요한 것은 쉽게 간과해 버리는 것입니다. 잘못된 가치관이 본질을 뒤집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런 잘못된 가치관들이 들어와서 경건의 능력을 몰아내고 말씀대로 살려는 영적 몸부림을 마치 광신도의 잘못된 언행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3. 교회 안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최근에 미국의 CIA 직원이었던 에드워드 스노든 이라는 청년이 홍콩으로 도망가서 미국이 자국민은 물론이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국가 개인 기업을 가리지 않고 도청하고 정보를 수집해온 것을 폭로해 전 세계가 충격을 받았습니다마는, 저는 이 사건을 놓고 발언하는 미국 대통령의 태도에 아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일은 정보를 관리하는 기구를 둔 국가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다 하는 일이라고 했고, 훔쳐온 정보들을 다른 나라들이 원한다면 공유할 수 있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법과 도덕에 어긋나는 일이요 범죄적 행위라도 남들이 다 하는 일이면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 정보를 나눌 수 있다는 이 말은 모든 국가를 공범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며, 이런 일을 아무런 것도 아닌 것처럼 전 세계를 향해 이야기하는 대통령의 태도에서 이 사람들이 지금 전 세계를 대상으로 또 무슨 일을 비밀리에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섬뜩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세상의 구원의 방주로, 빛과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는 교회가 이 같은 세상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는 것은 교회 역시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탐심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과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고 있다면 세상이 우리를 향해 무슨 욕을 하든지 손가락질을 하든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이 이 바리새인들하고 닮았다고 한다면, 이 세상 사람들의 소리와 손가락질은 바로 본문에 나오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음성이고 경고임에 분명한 것입니다. 사람들을 향해서는 분쟁하지 말라고 하면서, 우리끼리는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고 분쟁하며, 말씀으로는 불쌍히 여기라고 가르치면서 우리끼리는 분노를 퍼붓고 세상 법정에까지 고소하고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위선이요 거짓이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망치는 일등 공심이 아니겠습니까? 4.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 사람들은 평소에 맹세를 남발했던 것 같습니다. 성전을 두고 맹세하면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성전을 장식한 금에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하며, 제단에 두고 맹세하면 지켜도 아니 지켜도 그만이지만 그 제단에 올려놓은 예물을 두고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성전을 장식한 금이 거룩한 것은 그 성전 자체가 거룩하기 때문이고, 제단에 올린 제물이 거룩한 것은 그 제단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 자체는 그 금들 보다 귀하고 제단은 드려진 수많은 제물 보다 귀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면서 사랑을 쏟고 온갖 정성과 피땀 흘려 모은 재물이라도 아까워하지 않는 것은 제 자식이 귀하고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부모 사랑 자식 사랑, 부부간의 사랑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은 제 자식보다 아이가 학교에서 남들보다 뛰어난 학교 성적이 더 귀하고, 반장 하고 상 받는 것이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제 아내 보다는 그 목에 걸린 금목걸이가 귀하고 손가락에 낀 다이야반지가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탐심이 문제였습니다. 인간의 탐심은 크고 작은 것을 분간하지 못하게 만들고, 인간의 욕심은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분간하지 못하게 하고,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분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라고 불렀습니다. 4. 누가21장에 보면 두 렙돈을 드린 과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자는 남편이 없는 불행하고 불쌍한 여자였습니다. 요즘 세상도 남편 없이 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예수님 당시의 과부의 삶이라는 것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삶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과부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무슨 감사할 일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의 두 렙돈의 헌금을 보시고 가장 많은 것을 헌금했다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당시의 두 렙돈은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느냐 하면 노동자 하루 품삯이 1드라크마인데 1렙돈은 그 1/128 이라고 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100-200엔 정도의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예수님이 한 끼 정도의 빵을 구할만한 그런 적은 금액으로 헌금한 이 여자를 보고 가장 많이 헌금 했다고 하셨으니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성경은 그 때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눅21:4). 당시의 많은 사람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은 물질과 명예에 빠지고 탐심에 빠져서 인생을 망치고 영혼을 망치고 있을 때, 이 여자는 그런 것에서 온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제자신의 삶 전부를 걸었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제 힘으로는 살아갈 능력도 자신도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과부는 적어도 인생을 망치고 영혼까지 파괴시키는 그런 욕심에 사로잡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5. 본문 23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고 했습니다. 의는 사회에 대한 정의를 말하고 인은 사람을 향한 자비를 말하고 신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신뢰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30년 가까운 목회를 하면서 내 안에 결코 남아서는 안 될 것이 있음을 알고 많은 괴로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향한 불신입니다. 이것은 한국을 떠나 있는 이민교회들의 동일한 현상이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 말씀으로 감화를 주고 거듭나게 만드는 것보다는 사람들에게 속아 넘어가서 상처를 입고 속이 상하고 낭패를 보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또한 목회자 선교사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이나 문제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동일한 사건이나 문제를 놓고 양쪽이 완전히 다른 말을 합니다. 미련하고 부족한 이 사람은 판단이 잘 서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둘 중에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요즘에는 나중에 알고 보면 양쪽 다 거짓말 하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공과 사를 떠나서 사실 그대로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거짓말의 진원지는 어디입니까? 그 사람 속에 있는 다름 아닌 탐욕이요 욕심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인간의 탐욕은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람의 눈을 어둡게 만들고 사람에게서 온전한 자유를 빼앗아 갑니다. 바리새인이 의와 인과 신을 버렸다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람은 아니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6. 마지막으로 본문 27-28절의 말씀을 보면서 회칠한 무덤이 오늘날의 교회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무덤에 가서 제사를 지내거나 유월절 같은 절기를 만나면 무덤에 회칠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덤을 깨끗하게 단장하고 예쁘게 보이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회칠하는 이유는 정반대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민19:16절에 보면 “누구든지 들에서 칼에 죽이운 자나 시체나 사람의 뼈나 무덤을 만졌으면 칠 일 동안 부정하리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체는 물론이고 무덤에 신체의 일부가 접촉되기만 해도 부정한 자가 되어 일주일 동안 성전에도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부주의로 무덤에 접촉되는 일이 없도록 이곳은 부정한 무덤이라는 표시를 확실하게 해서 미리 부정을 막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더럽혀지지 않도록 미리 경고를 주는 것입니다. 원인이 무엇이든지 일단 무덤에 회칠을 하면 깨끗하고 산뜻하게 보여 좋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썩은 시체가 누워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지나친 표현인지 몰라도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전도지나 대형 현수막을 걸어 놓고 이곳에만 쉼이 있고 구원이 있고 감격이 있는 것처럼, 이 교회에만 와야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선전합니다. 유명한 연예인 신자들을 동원하고 각종 프로그램을 동원해서 마치 잃어버린 한 영혼을 위해 이런 엄청난 일들을 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 말을 믿고 찾아간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갑니다. 교회가 크고 화려하고 사람들이 많이 몰리면 영적으로 충만한 곳인 줄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교회 안에는 말씀에 생명력을 잃고, 사람들끼리 모이면 위로 받기보다는 더 많은 상처를 주고 갈등을 가져 오게 만들고, 그래서 쉬고 위로받는 것이 아니라 실망과 때로는 분노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신앙심이 좋다고 평가 받는 사람들과 교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이 도리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방해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경우가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만일에 이 시대에 예수님이 우리 교회를 찾아 오셨다면 “회칠한 무덤” 이라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바리새인들처럼 열심히 전도는 해 놓고 결국에는 천국 문을 막아서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7. 여호수아 시대의 아간이 죄를 범하여 온 가족이 저주받아 멸망한 것이 탐욕 때문이었고,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저주받아 문둥병을 얻은 것도 욕심 때문이었고, 가롯 유다의 배신도 욕심 때문이었고, 예루살렘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역시 욕심 때문에 저주 받고 망하고 말았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갈5:24)다고 하였고, 사도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약1:15)다고 했습니다. 21세기 교회가 사명감을 갖고 최우선으로 싸워야 할 전쟁이 있다면 그것은 욕심과의 전쟁이요 탐욕과의 싸움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위해 전쟁의 깃발을 든다면 이 시대의 모든 교회들과 우리 교회는 이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과 은혜와 감동을 주며, 소망과 기쁨과 평안과 안식을 주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