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6.23.종교인과 신앙인(마태복음23:1-15)
[성경본문] 마태복음23:1-15개역개정
1.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8.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0.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11.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3.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4.(없음)
15.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종교인과 신앙인(마태복음23:1-15/2013.6.23.오전)
1. 한국에는 가나안 교인들이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언 듯 들어보면 약속의 땅, 축복의 땅인 가나안을 연상하지만 실상은 그 의미가 반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을 반대로 읽으면 (교회)안나가 라는 의미이니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과연 이 말이 사실이라면 백만이 넘는 교인들이 더 이상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다는 것은 한국교회의 위기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더 이상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된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첫째는 목사님의 설교에 은혜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교회가 헌금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요즘 교회에 문제가 너무 많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합니다.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런 문제 때문에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면 교회는 서둘러 해법을 찾아야 하고, 떠난 사람들이 돌아오도록 힘써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문제 이전에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적인 신앙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이 가나안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 나오지 않는 이유가 될 수 없는 것은 신앙인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성공하는 사람이 인생에서도 성공하고 예배에서 실패하는 사람이 인생에서도 실패한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예배가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서 느낀 것은 사람이란 정말 이중적인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제 몸이 병들고 다치거나, 그래서 죽을병에라도 걸리면 정말 도살장의 짐승을 잡는 것처럼 대수술을 해서라도 제 몸을 고치고 살리는데 최선을 다하면서 정작 주님의 몸된 교회가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고 은혜가 떨어진다고 싶으면 지금까지 섬기던 교회를 헌신짝 버리듯이 떠나는 것이 현대 교인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2. 문제는 이 사람들이 교회를 그만두고 난 후에 과연 이전처럼 그렇게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으며, 구원받은 은혜의 감격을 삶 속에서 변함없이 누릴 수 있으며, 제 신앙을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잘 지켜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4:24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고 하였고, 23절에는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 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들이, 너무나 많은 조건들이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고 있으며, 그 배후에는 반드시 사단이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죽을병에 걸린 제 몸은 무슨 수를 써서라고 치료하고 살리려고 하면서도, 왜 예수님의 몸된 교회는 은혜가 없다고, 문제가 많다고, 듣기 싫은 헌금을 강요한다는 그런 이유로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한 마디로 교회는 제 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살을 찢고 피 흘려주셨는데,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으시면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심으로 하나님께 버림받고 심판받으셨는데 우리는 그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무엇을 드렸으며 어떤 희생을 치렀습니까?
그가 피값으로 사신 교회를 위해 과연 내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저는 백 가지를 생각해 보아도 이런 것 때문에 교회를 멀리하는 것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나이 들수록 여기 저기 망가지고 고통을 주는 것이 우리의 육신입니다.
겉으로 보면 다 멀쩡하고 선남선녀처럼 보이지만 젊은 사람들조차도 한두 가지 질병을 가지지 않은 사람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연약하고 병든 육신을 달래가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육신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많은 병든 교회라도 그것이 주님의 몸된 교회인 줄 알고 떠나지 아니하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인내한다면 우리 주님은 우리가 원하고 기대하는 것 이상의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내 병든 몸을 살펴주고 치료하는 의사 선생님도 귀하고 고마운데, 우리가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고 아끼면 우리 예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3. 오늘 본문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즉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이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특이한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흔히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일반적으로는 그 사람의 말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을 보고 판단할 때, 그 사람의 한 가지 결점만 보고도 그 사람의 전체를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도 시간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은 다른 것에도 문제가 많다고 봅니다.
뻔한 거짓말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하는 것을 보고 그 사람 전체가 거짓과 불의의 덩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람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는 우리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에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지적하면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말이 신통찮으면 사람 전체가 신통치 않다고 생각하고, 한 번 거짓말이 들통 나면 그 사람의 모든 말이 전부 거짓말인 줄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의 말은 열심히 듣고 들은 대로 행하는 것은 좋지만 그 사람들의 행하는 것은 절대로 본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은 모세의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전부 옳은 말, 진리를 변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백성들에게 열심히 가르치지만 제 자신들은 자신들이 배우고 깨닫고 남에게 가르친 대로는 살지 않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의도는 이것입니다.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결점만 보지 말고 그 사람의 좋은 점들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의 결점과 잘못만 보는 사람은 결국 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사람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4. 우리 주위에 보면 어떤 조직 가운데서 정의감에 충만한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경험하고 배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의감을 가지고 악한 세력을 무너뜨린 사람들의 나중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제 자신이 더욱 거대한 악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이유는 불평불만이 가득한 사람들이 제 잘못은 모른 채 남의 잘못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되먹지도 않은 정의감에 충만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도 배울 것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번 감정이 상하고 한 번 불신해 버리면 더 이상 그 사람에 대해 눈과 귀를 막아버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면 배우는 것과 행하는 것은 전연 별개의 문제인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8절 이하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선생이나 지도자라는 칭함 받기를 좋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종교인과 신앙인의 구별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종교인과 신앙인의 특징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종교인은 말만하고 남을 가르치기를 좋아하고, 남의 존경을 받고 선생이라는 이름으로 칭함을 받고 먼저 인사를 받는 것을 좋아하지만, 신앙인은 믿음의 사람들은 남을 가르치거나 말하는 대신에 먼저 행함으로 제 자신의 믿음을 나타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강조하기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2:26)이라 했습니다.
우리 시대가 가르치는 훌륭한 선생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듣고 배운 것을 행할 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나안 교인들의 특징 중에 한 가지가 자기 교회의 목사님의 설교에 은혜가 없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는 설교만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명 설교를 듣고 능력으로 충만한 메시지를 들어도 내 속에 은혜가 없으면 전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에 대한 간절한 갈급함이 있느냐 없느냐는 이것입니다.
5.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너희가 선생 되지 말라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이 주님 앞에서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 앞에서 동일한 죄인이고 동일하게 연약한 인생이고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도무지 살아갈 수 없는 불쌍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도, 가정에서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나 그 자식이라도, 교회의 목사나 성도라도 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없이는 소망 없는 인생이요 불쌍한 존재인 것은 다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회자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갑과 을에 대한 논쟁입니다.
지금까지는 甲(갑)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소유나 능력이나 어떤 특권을 가지고 乙(을)이라는 제자신보다 연약한 존재에 대하여 지나치게 굴고 무리한 것을 강요했는데 이런 사회적인 분위가가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국의 기업풍토는 弱肉强食(약육강식) 즉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지배당하거나 먹히는 그런 흐름입니다.
그런데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흐름에서 보면 일본의 경우는 한국과는 다릅니다.
일본은 甲(갑)의 입장에 있는 대기업이라도 하청을 주는 乙(을)이라는 존재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갑이 아무리 잘해도 하청을 준 을이 부품을 잘못 만들거나 납기 기한을 넘기거나 생산 가격이 서로 맞지 않으면 결국 갑도 손해를 본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갑의 입장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을의 입장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갑은 을에게 하청을 주면서도 연신 잘 부탁한다고 머리를 숙이는 것입니다.
선생님이나 부모님이나 사장님의 경우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갑이고 상대는 내게 구걸하고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을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의 고백이 그 사실에 대하여 바른 답을 말하고 있습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딤전1:15) 라는 것입니다.
대 사도인 바울도 하나님 앞에서는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사도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는 지극히 연약한 존재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6.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甲(갑)의 존재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사실과 우리 모두는 피조물로서 乙(을)이라는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예수님의 관계는 어떤 관계입니까?
내가 죄인이고 부족하고 연약한 인생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결코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가 친밀하고 아름다운 관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어린 양이고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로 잘 표현하는데, 이 어린 양처럼 내가 연약하고 부족하여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이 사실을 깨닫지 않고서는 예수님에 대한 바른 관계도, 성령님의 도우심에 대한 바른 인식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내게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참 신앙인이 아니라 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처럼 그저 종교인에 불과하다는 사실뿐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인 13-15절을 보면 종교인의 특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국 문을 가로막고 제 자신도 들어가지 못하고 남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 버리는 지옥의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남다른 열심입니다.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한" (15)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의 육체적인 욕심에서 나오는 시기와 미움과 질투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 열심, 그런 수고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과 그런 열심이 결국 제 자신과 남들까지 망하게 만드는 것임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불행하고 안타까운 것은 교회 안에 이런 종교인들이 스스로에게 속거나 자기도취에 빠져서 제 자신은 물론이고 남들까지 망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7.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된 신앙인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3절에 기록된 대로 열심히 말씀을 듣고 배우지만,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처럼 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서도 목사인 저의 설교와 가르치는 것을 열심히 듣고 배우지만 절대 저의 행하는 것은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제가 좀 부족하고 잘못해도 인간적인 생각이나 혈기로 비판하거나 공격하지 마시고 기도로 예수님에게 다 아뢰시기 바랍니다.
공격하고 욕하면 똑같은 사람이 되지만 예수님만 바라보면 예수님을 닮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처럼 무조건 제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12절에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종말론적인 말씀으로 지금 당장에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종말에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서 그동안 우리가 행한 대로 보응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으심, 그리고 부활과 승천을 통해 증거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기록하기를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고 했습니다.
스스로를 올리고 높이면 하나님이 끌어 내리시지만 스스로를 낮추면 이미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은 우리를 그 분의 오른편으로 이끌어 올리시는 줄 믿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과 남들까지 망하게 하는 종교인이었지만 우리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 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함으로 우리에게 참 신앙인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8. 교회가 어렵고 내게 은혜가 안되는 것은 도리어 우리에게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히브리 민족이 애급에서 잘 먹고 잘 살았다면 왜 목숨을 걸고 출애굽 하겠습니까?
애급인의 학대가 너무 심하고 그래서 고통 중에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이 들으셨던 것입니다.
요셉도 형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다면 애급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형들이 작정하고 죽이려 달려드니 노예로 팔려간 것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종교인이 아니라 참 신앙입니다.
갈보리 십자가 언덕까지 따라 올라가서 예수님의 못 박히시는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 제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는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처럼 그런 심정으로 그런 태도로 교회를 사랑하고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의 따라간다면 우리는 정말 복된 사람들이요 택함을 받은 특별한 존재인 줄 믿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것도 하나님이 우리를 종교인이 아니라 참 신앙인으로 만드시려는 은혜의 수단이요, 가정이 어려운 것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에 잠시 어려운 줄 믿습니다.
예수님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과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 사실만 기억한다면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은 하나님이 영원한 미래까지 인도하시는 줄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