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6.2.가장 큰 계명(마태복음 22:34-40)

[성경본문] 마태복음22:34-40개역개정

34.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가장 큰 계명(마태복음 22:34-40/2013.6.2.오전)

1. 한국의 어느 신학자가 주간지에 기고한 글 중에 각국의 기독교인 비율과 범죄율을 비교하면서 신교, 구교를 막론하고 기독교 국가라고 불리는 나라일수록 범죄율이 높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는 90%가 개신교나 카톨릭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범죄율은 10%전후로 높고, 일본의 경우는 84%가 불교나 신도를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율은 2.3%정도라는 것입니다.
결국 왜 기독교인은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도덕적이지 못한가? 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기독교인들은 칭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화되지 못하며, 기독교인들은 죄 사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선행을 하지 않으며, 왜 기독교인들은 종교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인 성장이 없는가를 따지면서, 인간이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는 근거는 자기가 믿고 있는 종교적 신념에 의함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메커니즘에 의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뇌과학 분야에서 실험을 통해 이미 입증된 것이라 했습니다.
이 신학자의 결론은 현대기독교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만을 강조하고 구원받은 인간으로서의 사명과 책임에 소홀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되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고,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남다른 가야할 사명의 길이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처럼 살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나 기독교 신앙을 도덕적인 가치관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고, 우리가 구원 받았을 때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죄 가운데 있었고 똑같은 세상 한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의 성화는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성화나 선행이나 도덕적인 성장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늦어질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2. 그러고 보면 복음서에서 자주 등장하면서 예수님을 공격하고 나중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도록 만드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그리고 제사장들을 포함한 이 종교지도자들의 행동을 생물학적인 메커니즘으로 보아야 하는지, 그 시대에도 사랑과 은혜만을 강조하는 종교적인 배경 때문인지 어떤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나 오늘날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도 도덕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한 가지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에 관한 것, 즉 사랑의 결핍에서 오는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두개인들이 망신만 당하고 물러가자 이번에는 다시 바리새인들이 나타나서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들의 질문은 율법 중에 제일 큰 계명이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사람들이 왜 이런 질문을 던졌는가 하면, 유대인들에게는 탈무드가 있고 이 탈무드에 기록된 율법은 613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금기사항이 365가지가 있고, 행할 것을 명령하는 내용이 248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이 613가지의 명령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며 그 가치의 경중을 따져 어느 계명이 다른 계명보다 더 큰지 순서를 매기는 것이 그들의 중요한 신학적인 과제였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중세 수도사들이 날카로운 바늘 끝에 천사가 몇 명이나 앉을 수 있느냐로 씨름하는 그런 논쟁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3. 아무튼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613가지의 율법의 명령들을 다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12살 때부터 예루살렘 성전에 앉아 쟁쟁한 율법사들과 논쟁을 하던 예수님의 실력으로 볼 때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유치하기 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알아듣기 쉽게 친절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 는 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의 내용이 많고 613가지의 명령이 있지만 그 중심사상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왜냐면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율법의 중심 사상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 채,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인 이 율법으로 사람들을 괴롭히고 그들의 종교적인 짐을 무겁게 만드는 일에 전문가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이런 습관과 태도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에게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말씀을 배우러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여 올무에 빠뜨리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배우고 습득하는 대상에 대한 본질을 잃어버릴 때 잘못된 길을 가기 마련입니다. 그야말로 바리새인들이 좋은 예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알아듣기 쉽게 그리고 친절하게 율법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미 신명기 6:4-9절에 있는 내용의 일부를 인용하신 것입니다.
그곳에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전부 동원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쏟으라는 말씀입니다.

4. 그런데 이 말씀을 생각하면 정말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어릴 적 이야기인데 모두 가난하게 살다보니 밥을 얻으러 오는 거지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먹을 것을 따로 준비해 놓았다가 주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하루에 몇 사람씩 오기도 하고 한 번 온 사람이 뒷문에 와서 또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전에 미국에 가면 강도가 많으니 잘못하면 가진 소유를 다 털리고 목숨도 위험하니 미리 강도 만나기 전에 몇 십 달러를 다른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강도만나면 따로 준비한 것을 내어 주면 위험한 상황을 넘어 갈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마치 동냥 얻으러 온 사람을 위해 미리 준비하고, 강도 만날 것을 미리 준비한 것처럼 나 자신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정말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계획된 삶 속에서 계획된 대로 하나님께 드리고 계획된 대로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데, 우리가 자녀를 사랑할 때나 부부관계도 늘 계획대로만 살아가고 계획된 범위에서 사랑하는가 묻고 싶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다 어디서 온 것입니까? 사랑의 근본인 하나님께로 온 것인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이 어떻게 우리에게 임했습니까?
하나님의 품에 있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받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제 자식을 사랑하는 그 사랑보다 더 귀한 사랑으로 여기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5. 우리가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성경구절을 외우고 있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인용하신 이 신명기 6:4-9절의 말씀을 매일 두 번씩 외운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외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율법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받아들이고 청종하며, 이것을 나와 내 자녀들이 함께 지키며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얻으러 온 사람에게 적선이나 하듯이, 강도를 속여서 얼른 도망가 버리듯이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죄요 고통입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 는 사랑을 요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본문에서 우리에게 두 가지 사랑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고 두 번째는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 첫째 둘째를 구분 짓는 것은 머리 나쁜 바리새인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그렇게 구분을 지은 것이지, 사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나 이웃을 향한 사랑이나 같은 것입니다.
왜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이웃을 향한 참된 사랑을 나눌 수 없으며, 이웃 사랑하는 마음이 다른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내 안에 부음바 되었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6. 여기서 사랑을 첫째 사랑 둘째 사랑으로 구분 짓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만 사랑하고 이웃이야 어찌되었던지 적당하게 사랑하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첫째 계명이 두 번째 계명을 수반하고 두 번째 계명은 첫 번째 계명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 40절에서 결론 맺기를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동시에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리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로마서 13장 8-10절에서 밝히기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 고 했고, 그러므로 이런 "사랑은 율법의 완성"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에는 하나님만 아니라 이웃이나 성도들끼리, 그리고 불신앙의 사람들과 심지어 우리의 신앙을 핍박하고 미워하는 사람들, 우리의 원수까지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우리가 이렇게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가운데서 넘쳐나야 마땅한 이런 사랑이 점점 식어져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결함은 내게 임한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도 하나님을 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원수 되었던 우리를 품으셨고,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까지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건만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너무 간단하게 생각했고, 너무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장사꾼들이 대가를 받고 거래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7.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 가야 합니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요 거룩하신 여호와로 경외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우리 몸과 마음을 드려 헌신하며, 일생의 삶을 통해 우리의 주인으로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어떻게 행하는 것입니까?
모든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우리 자신을 희생하고, 그들의 행복과 기쁨을 위해 사랑의 마음으로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성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그분의 사랑을 배우기보다는 계명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어떤 계명이 더 크냐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먼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고 그래서 연약한 인생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라는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이 사랑을 가리켜 무엇이 크고 작으며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고 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우면서 먹여 주고 입혀주고 학교에 보내는 것만이 사랑이 아닙니다.
돈이 많이 들어가는 것만이 사랑이 아닙니다.
자녀의 손을 잡아주고, 안아 주고 위로해 주고, 이름을 불러 주고 쳐다만 보아도 그것도 온전한 사랑입니다.
학교 공부만 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도 들려주고 가르쳐 주고, 예배를 함께 드리고, 아이들이 교회 갈 때 그 손에 성경책과 헌금을 들려주는 것도 큰 사랑입니다.
부모는 피곤해서 자녀들과 함께 깊은 잠 가운데 빠져 있어도 우리 하나님은 밤새도록 우리의 잠자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시며, 아침에 눈을 뜨면 새 마음과 새 생각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목숨을 걸고 사랑해 보지 않고는 그 사랑의 크기를 알 수 없으며, 온 마음과 몸을 다해서 사랑해 보지 않고는 참 사랑의 가치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8. 국가를 이루는 근간은 법에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천국은 천국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교회는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나 성품이나 힘은 각각 따로 떨어질 수 없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전인격적인 존재입니다.
마찬가지로 첫째는 하나님 사랑, 둘째는 이웃 사랑이라고 했지만 39절의 "둘째는 그와 같으니" 라는 이 말씀의 의미는 "첫째와 마찬가지로"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첫째 사랑이 없이는 둘째 사랑도 없고, 둘째 사랑이 없이는 첫째 사랑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66권의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이것 보다 더 큰 계명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그 사람이 이웃도 우리의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이 같은 온전한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풍성해지기를 소원합니다.

コメントを残す

メールアドレスが公開さ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 が付いている欄は必須項目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