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4.7.왕의 초청 1(마태복음22:1-14)
[성경본문] 마태복음22:1-14개역개정
1.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 왕의 초청 1(마태복음22:1-14/2013.4.7.오전) 1. 옛말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속마음을 읽을 수 없는데서 나오는 말입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겉 사람의 모양과 속사람의 마음은 다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젊은 시절에 친구와 부산에 여행가기로 하고 서울역에서 두 사람의 차표를 끊어 놓고 막차가 출발하기 직전까지 기다렸는데 친구는 끝내 오지 않았고 할 수 없이 혼자 출발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황당했지만 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나중에 친구가 그날 나타나지 않았던 이유나 그것을 설명하는 태도에 너무 실망했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다보면 이런 기억하기도 싫은 과거의 감정을 되살리게 만드는 일들이 가끔 있습니다. 교회가 준비한 특별집회라든가 창립기념 예배나 부활절, 성탄절 같은 절기행사는 교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행사인데, 사람들이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출석하지 않거나, 당연히 와야 할 사람이 오지 않을 때, 연락도 없이 중요한 행사에 결석을 하게 되면 목회자로서 참으로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만사를 제쳐두고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당연히 모여 힘을 합해야 할 사람들이 오지 않을 때, 목회자의 마음은 섭섭한 것입니다. 요즘은 상대방 쪽에서 오겠다고 먼저 약속을 해 놓고 그 때가 되면 오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사정이 있고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속이 상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럴 때 이래도 되는가? 이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2. 오늘 본문의 말씀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이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향해서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비유에서 등장하는 왕은 하나님 아버지요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시며 임금의 종들은 선지자들이요, 그리고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즉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도 사람들의 겉과 속이 다른 행동에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와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저들 스스로도 선민의식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면서도 선지자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오직 자신들의 개인적인 일과 욕심에 집중하면서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어느 왕이 그의 아들 결혼식을 준비하고 여기에 소중한 사람들을 초청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돈이 좀 있다는 사람들의 자녀 결혼식은 일류 호텔에서 수억대의 비용을 쏟아 부으며 명망 있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그 자리를 빛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물며 임금이 아들의 결혼식에 쏟는 정성과 희생은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중요한 잔치일수록 아무나 초청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회적인 신분이 높으면 높을수록, 소유한 재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잔치에 초청받는 사람들도 남다른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왕이 아들의 결혼식에 사람들을 초청했다면 그들이 어떤 관계의 사람들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3. 그런데 3절에 보면 전연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의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3절에 보니 그들의 의도가 분명했습니다. "오기를 싫어하거늘"입니다. 여기서 싫어한다는 것에 대한 원어의 의미를 보면, 잠시잠깐의 감정적인 변화나 일시적인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이 일에 대하여 그 마음이 거부감으로 가득차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평소에 싫은 감정을 계속 가지고 있었던 것을 왕의 청함을 통하여 노골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비롭고 사람을 쉽게 믿으며 의심할 줄 모르는 왕은 자신의 의사를 종들을 통하여 전달하는 과정에 무엇인가 오해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종들을 보내면서 특별히 이 잔치가 얼마나 중요하고, 아들의 결혼식을 위해 자신이 쏟아 부은 정성과 수고가 얼마나 지극하였는지를 잘 설명하고 반드시 참석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고 있는 모습이 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초청받은 당사자들은 소극적으로는 왕의 초청을 무시하고 여전히 제 일거리를 찾아 가버렸고, 적극적인 사람들은 그 혼인잔치의 초청을 반대하고 왕이 보낸 종들을 때리고 멸시하고 수치를 당하도록 만들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기 일을 보러 간 사람들의 구체적인 반응이 무엇입니까? 5절에 보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 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왕의 초청을 무시하기를, 마치 애초에 초청도 받지 않은 것처럼 처음부터 그런 일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평소 하던 대로 밭으로 가거나 장사하러 갔습니다. 이것은 제가 살고 섬기는 국가의 왕의 특별한 초대보다는 자신들의 개인적인 일, 일상적인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사람들의 이런 행동, 이런 생각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반역입니다. 왕의 통치에 대한 거부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이 사람들의 태도는 왕에 대한 반역이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왕을 얼마나 무시하고 얕잡아 보았으면 이런 행동을 합니까? 4. 이스라엘, 또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중동을 중심으로 그 지역에는 강한 나라도 많았고, 뛰어난 민족도 많았고, 유대인들보다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뛰어난 민족과 나라들은 얼마든지 많았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유대인을 선민으로 삼으셨습니까? 히브리인의 의미는 건너온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목민이요 제 나라 제 땅이라고 부를 만한 그런 것도 소유하지 못한 아주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족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7:7절에 보면 그들을 선민으로 택하신 이유가 다른 민족보다 강하고 수요가 많아서가 아니라 다른 민족 중에서 가장 적은 자들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애급에서의 수백 년에 이르는 노예생활은 그들이 성분이 노예 출신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들은 열등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신32:10) 다고 하였고,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욥7:19)셨다고 했습니다. 또한 예레미야3:14절에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은 자신을 그들의 남편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사야 선지자는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사43:4)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잘못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선지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멸시하고 나중에는 왜 아들까지 십자가에 못박에 죽여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 쾌락과 우상숭배에 빠지고 거역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5.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넘치면 감당하지 못합니다. 특히 사랑과 은혜가 넘치면 그것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런 행동은 죄가 가져다주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물이 귀한 줄을 모르는 사람은 사막에 가 봐야 합니다. 부모 사랑이 귀한 줄 모르는 사람은 외국에 나가 혼자 살아봐야 합니다. 두 다리가 귀한 줄 모르다가 교통사고 당한 후에 다리를 못 쓰게 되면 그 때 내 다리가 얼마나 귀한 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너무 많이 사랑하셨습니다. 대한민국에 기독교 이단세력이 최근에 기존 기독교의 1/3가까이 수준으로 육박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의 특징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재정이 흘러넘치고 일꾼이 흘러넘치고 열심과 충성심이 넘치고 있습니다. 교주들이 자기를 추종하는 신자들을 사랑하고 염려하고 그들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시간, 물질, 몸까지 바쳐가면서 충성합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교주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들은 교주의 사랑에 목말라 있고, 인정받고 싶어 전 재산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고 있습니까? 나같이 못난 죄인을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십자가에 희생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사랑이 없는 곳에는 사랑을 목말라 하고 있는데, 사랑이 넘치는 곳에는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서 사랑의 배신과 사랑이 변하여 미움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6. 문제는 이것이 어찌 유대인만의 이야기가 되겠습니까? 어찌 이것이 종교지도자들만을 향한 교훈이겠습니까? 정말 우리가 사랑에 목말라 한다면 적어도 이단에 빠진 사람들처럼 그렇게 열심을 내는 흉내라도 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고 있다면 당연히 감사가 넘치고,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면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3:16) 고 하셨습니다. 왜 오늘날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 아버지의 초청도 거절할 만큼 죄악에 담대해져 있습니까? 그 답이 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밭, 자기 사업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귀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문제는 나의 일, 나의 가정, 나의 자식, 내 남편과 아내, 내가 소유한 것들이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는 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구원은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주어지는 줄 알지만, 내 사업, 내게 속한 세상의 모든 것들은 내가 정성을 쏟고 노력하고 머리 쓰지 않으면 내가 만족할 만큼의 결과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미 잡은 짐승인가 물고기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얻으려고 머리 쓰고 열심을 내는 사람이 있습니까? 만일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이라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도 은혜도 아닙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귀한 하나님의 사랑이 정말 거저 얻어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심판의 대상일 뿐이요 저주받은 인생일 뿐입니다. 내가 노력하고 얻는 것은 귀한 것이고 거저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까? 7. 바로 이런 생각을 가진 이 청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남은 일이 무엇입니까? 왕의 진노였습니다. 본문 7절에 보니 종들을 능욕하고 죽이고 왕의 청함을 거절한 사람들에게 군대를 보내어 그들을 죽이고 그 온 마을을 불 태웠다고 했습니다. 마을을 불태웠다는 것은 내 가정 내 식구는 물론이고 내가 돌보는 밭이나 사업이나 짐승까지 다 망하고 죽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왕의 자비와 호의를 거절하고 무시한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변하여 미움이 되었다는 유행가 가사도 있듯이, 사랑을 거부하고 자비를 거부하고 호의를 거부하고 그것을 짓밟으면 어떤 사람의 마음에도 미움이 생기는 법입니다. 하물며 왕의 초청을 거절하고 능욕한 사람들의 말로는 불을 보듯 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분명히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에 대한 잘못된 태도는 어떤 경우에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한 예루살렘의 함락과 디아스포라의 긴 역사며, 히틀러에 의한 유대인 학살은 선민이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하나님 사랑의 거부가 얼마나 무서운 대가를 치루는 것인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 비유를 통한 경고를 이 유대인들처럼 깨닫지 못한다면 이제는 영원한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만에 하나의 재앙을 위해서 보험을 여기 저기 걸어 놓고 사는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앞에는 무모할 정도로 어리석은가 하는 사실입니다. 8. 부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잔치를 준비하고 그곳에 사람을 초청한다는 것은 주인의 기쁨이요 동시에 청함을 받은 사람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55:1절에 보니,"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왕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초청의 이유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을 함께 누리라는 것이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의 진수를 영육간에 넘치도록 맛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같은 그 분의 초청은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을 위한 초청일 수도 있고, 말씀으로 새롭고도 풍성함을 누리도록 하기 위한 초청일 수도 있고, 우리를 복음의 일꾼으로 부르시는 초청일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부르는 하나님 아버지의 초청에 기쁨과 감사함으로 반응하여 매일 매 순간 그리고 영원토록 아버지 사랑의 풍성함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