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4.14.왕의 초청 2(마태복음 22:8-14)
[성경본문] 마태복음22:8-14개역개정
8.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왕의 초청 2(마태복음 22:8-14/2013.4.14.오전)
1. 지상 교회는 그 차제가 혼인잔치와 같습니다.신랑되신 예수께서 그의 사랑하는 신부된 성도들과 영원한 생명의 가약을 맺고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이곳에서 잔치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풍성한 말씀의 떡과 기쁨으로 넘치는 찬양이 있으며, 왕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초청에 감사로 화답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상 교회는 혼인잔치를 하는 천국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 아들의 혼인잔치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손님들이 기쁨으로 이 초청에 응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이 잔치에 청함 받기를 꺼려하고 오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왕의 초청을 거절하는 명분도 가지각색이었습니다.
같은 사건을 누가복음 14:16-24절에 기록하기를, “다 일치하게 사양하였”다고 했습니다.
혼인잔치의 청함에 응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한 사람은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고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고 했고, 또 다른 사람은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는 것입니다.
한결같이 이 사람들은 직장문제나 사업문제나 경제적인 문제나 가정문제로 왕이 초청한 아들의 결혼식에는 참석 할 수 없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악의에 가득차 마음으로 왕을 대적하여 그의 종들을 죽이거나, 주는 것도 없이 미워하는 마음으로 종들을 능욕하며 이 혼인잔치를 고의적으로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2. 이와 같이 불신앙과 악의에 가득차서 왕을 대적하고 혼인잔치를 방해하는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 택함 받은 선민이라는 특권의식으로 교만해진 유대인들입니다.
그 결과 불신앙과 배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유대인에게 임하면서 이 구원의 역사가 이제는 이방인에게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주에 말씀드린 오늘 본문의 배경이며 오늘 왕의 초청 두 번째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많은 것으로 준비된 혼인잔치가 초청받은 사람들이 아무도 오지 않자 왕은 종들을 불러 급히 “사거리 길에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여 오너라”고 명령했습니다.
누가14:21절에는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 오라”고 하였고, 본문 10절에는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교만한 마음에 구원의 은혜를 스스로 거절한 유대인 이외에는, 인간이 보기에 선한 자나 악한 자의 구별이 구원받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육신이 병들거나 망가지거나 그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 사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구속의 은혜를 입는 일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사도바울이 말한 대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 (롬5:20)다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죄 많고, 버림받고, 고통당하는 참혹한 죄의 현장일수록 더욱 뜨겁고 강력하게 역사하는 줄 믿습니다.
3. 어찌되었든 왕은 혼인잔치에 손님으로 가득찬 것을 보고는 기쁜 마음으로 혼인잔치 석상을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은 채로 혼인잔치에 들어와 앉아 있는 것을 보았고, 왕은 놀란 나머지 그 손님에게 왜 예복을 입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잔칫집에서 입는 예복은 유대사회에서는 오래된 습관이었습니다. 손님들이 잔칫집에 오면 미리 준비된 예복을 선물로 내어 놓고 그것을 입고 잔치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왕이 예복을 입지 않은 손님에게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느뇨?”하고 묻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예복을 입는 것은 말 그대로 초청한 주인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고, 예복을 입는 것은 초청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왕이 준비한 예복을 입지도 않고 자리에 앉아 있었고, 이것이 왕의 진노를 불러 오고 말았습니다.
이 잔칫집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운 지상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잔치집의 예복은 다름 아닌 예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죄인의 죄가 가려지고 씻기고, 그래서 거룩함을 입는 영적 세마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잔칫집에 청함을 받아 예복을 입었다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어떤 힘이나 능력이나 소유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옷 입어 거룩하고 의롭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곧 믿음의 의, 칭의를 입은 것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이 성령으로 잉태됨으로부터 시작하여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까지 끊임없는 사단의 활동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방해하고 시험했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한 것 같지만 영적으로는 무서울 정도로 치열하고 영혼을 지키느냐 빼앗기느냐는 격렬한 전투장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루하루를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으며, 어떻에 우리의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스스로의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절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가 보존되고 성도들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 때문인 줄 믿습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귀하고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는 것 이외에는 우리에게 소망이 없는 줄로 믿는 사람은 늘 십자가를 붙들기 마련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시험하는 마귀를 이길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 때 세상과 마귀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되신 하나님은 혼인잔치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흰 세마포를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내 힘과 내 소유를 믿고 나아가면 마귀의 밥이 되지만, 보혈의 공로를 믿고 의지하고 나아갈 때에는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은 영원한 승리자가 되는 줄 믿습니다.
5.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유대인도 아니면서 이방인으로서 유대인 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사실은 넘치는 감사와 감격과 기쁨 이외에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표현할 길이 없는 은총이요 은혜요 축복인 줄 믿습니다.
우리는 왕의 초청을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부름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구원의 은총을 거부함으로 곁가지로 겨우 구원받은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조차 이 사실을 깨닫고 고백한 것이 무엇입니까?
“죄인 중에 내가 죄수니라” (딤전1:15) 는 것입니다.
바울도 자신이 구원받을 만한 합당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복음을 위한 사역은 그 어떤 사도들보다 뛰어난 열심히 자신을 기쁜 마음으로 희생하였던 것입니다.
혼인 잔치의 왕의 진노가 격렬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초청 받을 자격도 없는 자에게, 구원의 자격도 묻지 않고 무조건 초청한 은혜를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초청한 왕에 대한 모욕이요 왕에 초청에 대한 또 다른 거부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슥3:4절에 보면, “그 더러운 옷을 벗기게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왕의 혼인잔치의 초청이 강권적이고 무제한적이고 그래서 그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잔치임에는 분명하지만, 일단 이 잔치에 청함을 받은 이상은 반드시 혼인잔치에 합당한 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왕의 초청이 강권적이고 무조건적이기는 하지만, 이 혼인잔치에 들어온 사람들이라고 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 증거로 청함을 받았으나 한결같이 거부한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혼인잔치에 들어왔지만 예복을 입지 않고 그래서 왕의 진노를 받고 쫓겨난 이 사람이 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6. 오늘날 교회 안에 사람들이 많아도 이 사람들이 다 구원에 이르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구원의 은총이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우리들의 가정은 물론이고 이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교회 안팎에서 자신의 능력이나 행함이 인정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은총을 값없이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것이 자신의 어떤 공로나 특별한 능력 때문에 주어진 것처럼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기도함으로 겸손해지고 말씀 앞에 무릎 꿇어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의지보다는, 제 힘을 믿고 스스로의 능력이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임에 분명합니다.
교회 안에서 교인의 흉내는 낼 수 있어도 죄에서 구원받은 이후로 변환된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감당할 수도 없으며, 생각은 물론이고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요8:44절에 보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지 않는 또 다른 영적인 태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로 시작하는 말씀입니다.
저들은 마귀에게서 왔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옷 입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결코 왕되신 아버지의 초청에 응할 수 없는 그런 운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저들은 이 세상에서 좁은 문 좁은 길이 아니라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로 가기를 좋아하고, 십자가를 붙들고 그 아래서 은혜를 사모하기 보다는 세상을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옷을 입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7. 마지막으로 중요한 사실은 왕되신 하나님의 혼인 잔치를 위해 사람들을 초청하는 그 일에 쓰임 받은 종들이 누구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문맥으로 보면, 왕의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였다고 했으니 이것은 구약에서는 선지자들이요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사도들을 일컫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선지자도 사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 볼 때 구원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선지자나 사도와 같은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할 일이 분명해졌습니다.
왕되신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에 마땅히 일꾼으로 쓰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구원의 반열에 불러 주셨고, 남다르게 먼저 구원으로 인도하신 것은, 이 세상 가운데서 장차 구원받을 사람들을 이 혼인잔치에 불러 모으는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강권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사람을 차별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의 눈으로 보는 은혜로운 눈의 소유자가 되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는 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 일을 위해 지상에 여기에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일을 위해 일본 땅으로 부름 받은 줄 믿습니다.
7. 교회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는 왕의 잔칫집입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지만 택함을 입은 자가 적은 것이 이 시대의 현실이지만, 이 교회는 개개인의 믿음의 능력이 크게 나타나서 뭇 영혼을 구원하는 이 시대의 방주역활을 감당하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또한 여기서 회개와 거듭남의 은총이 넘쳐나고, 하나님의 자녀 되고 예수님의 제자된 자의 삶이 드러나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가 구원의 잔치를 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흉내도 낼 수 없는 그런 기쁨과 감사와 감격이 넘치는 그런 잔치집이 되도록 왕의 말씀에 순종하여 거리로 나가서 무조건 만나는대로 사람들을 데려다가 아버지 집을 채우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