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4.10.심령이 가난한 자(마태복음5:1-12)

[성경본문] 마태복음5:1-12개역개정

1.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심령이 가난한 자(마태복음5:1-12/2011.4.10.오전)
1.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신구약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특징에 있어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기준은 사람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행동에서 죄를 찾아내고, 사람의 행동에 따라 시비를 가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의 마음에 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적질 같은 것들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지만 않으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신약에서는 마음으로 미워만 해도 살인죄에 해당하고, 마음으로 음욕만 품어도 간음했다고 하고, 욕심을 품는 것 자체가 도적질이고 간음이고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니, 구약의 계명들은 행위에 따라 처벌을 받지만, 신약의 경우는 행위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 상태까지도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 관한 부분을 놓고 볼 때 우리는 인간적으로 실망하기 마련입니다.
차라리 하라! 하지 말라는 십계명처럼 행동으로 드러나는 행위에 대한 명확한 선을 그은 명령이라면 간단하지만, 우리 마음에 관한 문제는 결코 쉽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하루에도 꼴 백번 변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것도 21세기의 최첨단 문명 속에서 살아가다 보니 마음으로 느끼는 감정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매일 매 순간 보는 것 마다 자극을 받게 되고, 어디서든지 우리의 마음을 유혹하고 충동질 하는 그런 환경에 갇혀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산상수훈에 나오는 주님의 가르침에 도리어 실망하게 됩니다.
더구나 5장의 결론부분에서「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고 하셨으니 주님의 말씀에 절망감을 느끼게 됩니다.
과연 이 산상수훈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왜 주님은 우리가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으로 강요하고 계십니까?

2. 사실 요즘 기독교 신앙의 흐름이랄까 믿는 사람들의 삶을 보면 실망스러운 부분이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 못지않게 욕심이 많은 교인들,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경쟁심이나 명예욕에 대한 것들이 언론에 노출이 되고, 국가의 법에서부터 시작하여 개개인과의 약속에 이르기까지 이런 것들을 지키지 못해서 오는 지도자들의 부정적인 모습 때문에 교회가 욕을 먹고, 기독교가 난타 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럴 때는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인 이 산상수훈이 위로가 됩니다.
왜냐면, 나는 이렇게 부족하고 우리가 문제가 많아도 원래 기독교는 세상 사람들이 따라 오지 못하는 그런 가치관과 윤리관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막상 주님의 말씀을 내 삶에 실천하려고 할 때 당면하는 자괴감이나 낭패는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왜 나는 좀 더 겸손하지 못할까? 왜 이렇게 욕심이 많을까?
왜 나는 성질내고 토라지고, 왜 양보하지 못할까?
예수님의 제자라면서 도대체 나는 예수님 닮은 데가 하나도 없으니------.
그래서 평생을 살아도 행하기 어려운 말씀을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수십 년을 믿어도 헛된 세월만 보냈다고 한탄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실망하고 고민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오늘 주어진 본문을 읽고 또 읽고 묵상해 본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던 그 수준에서 머물지 아니하고 산상수훈의 더 깊은 의미를 깨닫도록 주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3. 3절 이하에 보면,「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이렇게 이어지고 있는데, 이 모든 말씀이 이 세상에서는 통하지 않는 내용들입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요? 오히려 천덕꾸러기며, 삶이 고통스럽고 불행합니다.
그러나 부한 자는 넉넉하고 여유가 있고,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으며 부한 자들의 삶이 부럽기만 합니다.
애통하는 자가 왜 복이 있습니까? 징징거리며 탄식하며 우는 자보다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가 백배나 더 좋습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강한 자가 독점해서 온유한 사람이 차지할 땅은 없습니다.
마음이 깨끗해서는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남들이 다 내 마음 같다고 생각한다면 평생 휘둘리며 살고, 있는 것도 다 빼앗기는 세상입니다.
현실이 이렇고 보니 예수님은 전부 반대로만 말씀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이나 목사님들은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는 것으로는 꼭 닮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목사님은 우리 형편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3절을 다시 들여다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곳임이요」.
심령이 가난해진다고 천국을 소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차라리 가진 소유로 천국처럼 꾸며 놓고 사는 것이 훨씬 간단할 것입니다.

4. 그렇다면 본문의 8복의 핵심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핵심은 천국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처럼 완벽하게 겸손해지고, 온유함으로 변화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그런 천국이 아니라, 주님이 다스리는 그 분의 왕국에서 시민으로서의 천국생활을 누리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스리시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구약 성경 전부를 다 지켜 행한다고 하여도 사람으로는 천국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마13장의 천국 비유를 통해 나타난 것처럼,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 천국이요, 그가 머무시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우리 마음에 영접하면 우리 안에는 이미 천국이 시작된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인본주의적으로 스스로가 어떤 노력을 해서,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을 통해 얻어지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 주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대로 인도함을 받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심령이 가난한 자와 함께하시니 저절로 그는 천국을 소유한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주님의 위로가 있으니 천국의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를 주님이 도우시니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결국 8복을 포함한 산상수훈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관계가 파괴된 곳에서 지옥이 시작되고, 바른 관계에서 천국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5. 사람은 주어진 환경이 바뀐다고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남다른 특별한 사랑을 받는다고 행복해지거나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서는 그 어떤 행복도 위로도 기쁨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누구도 바로 살 수 없으며, 참된 위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지성인이요, 겉으로는 부자며 미인이라 하여도 하나님 떠난 심령은 전부 공허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죄를 짓고 미친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만이 내 빈 마음을 채우고, 주님만이 내 심령을 채우고, 주님만이 나의 참 행복인 줄 믿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심령이 비어 있다는 의미인데, 이 빈 심령 속을 예수님으로 채울 때 우리의 삶이 천국의 삶이 되는 줄 믿습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습니까? 주님 자체가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심령을 비워둔다고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 빈 곳을 채워야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연 누가, 어떤 사람들이 그 심령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케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산상수훈을 읽어내려 가다 보면, 우리는 스스로 실망하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름대로 내 안에는 의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교통위반도 없이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려는 착한 마음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려움을 당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교회일이라면 우선해서 섬기는 마음, 은혜로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도 내 안에 어느 정도의 의로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보다는 그래도 내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산상수훈에 와서 그런 것들이 다 소용이 없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도리어 말씀을 통해서 내 안에 숨어 있는 죄의 습관들과 부끄러운 것들이 낱낱이 드러나면서 절망하게 됩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죄 때문입니다.

6.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요즘 교회를 정하지 못하고 떠도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한마디로 교만입니다.
사람들은 저를 보고 한 교회서 26년을, 한 도시에서 30년 가까운 사역을 한다고 칭찬하지만, 저도 이 교회, 이 도시를 여러 번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갈등하고 고민하고 생각하는 마지막 단계에 가서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교만한 마음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나 하고는 이 사람들(이 도시나 단체나) 수준이 안 맞아!
다른 곳에 가면 이 보다 잘 할 수 있을 거야 하는 기대감, 심지어 낙심하고 실망하는 것조차 내 교만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내가 낙심하거나 그래서 이곳을 떠나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생각이 26년의 세월을 한 자리에 머물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에게는 누구나 평소에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숨어 있는 교만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기 마련입니다.
이 8복의 말씀은 바로 이런 우리의 교만을 깨트리는 주님의 손길이라 생각합니다.
5장 마지막에서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처럼 우리도 온전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그 말씀에 따를 힘도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손을 들고 항복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말씀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릎을 꿇고 나면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아! 이 말씀은 주님이 억지로 지워주는 율법의 멍에가 아니라 내 안에 들어오셔서 하나 되기를 원하시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주님을 멀리에 서서 바라보면서 닮을 수는 없습니다.
주님을 내 심령에 모셔 들일 때, 그 때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을 닮고자 하는 갈망으로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오셔야 우리는 성령님의 도움도 사모하는 줄 믿습니다.

7. 산상수훈은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우리를 새롭게 재창조하시는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손에 의해 부서짐으로 그것이 고맙고 감사한 것입니다.
혼자서 몸부림치며 살아왔던 그 고통스러운 삶 속으로 주님이 들어오심으로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절망을 통해서 새로운 빛이 보이고, 무릎을 꿇으면서 참된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8복의 한 구절도 받아들일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에서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심령을 주님으로 채우면 천국이 임하는 줄 믿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주님의 손을 붙잡으면 주님의 위로가 있는 줄 믿습니다.

천국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곳이요 천국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요, 영원한 그곳에서 이 8복의 말씀대로 사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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