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8.29.고난 위에 서 있는 교회(고린도후서 11:16-33)

[성경본문] 고린도후서11:16-33개역개정

16.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

17.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18.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19.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20.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21.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22.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23.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30.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31.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32.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33.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고난 위에 서 있는 교회(고린도후서 11:16-33/2010.8.29.오전)

1. 2007년 11월호 다락방에 미국 펜실베니아에 살고 있는 한 성도의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주일 날 목사님의 설교 제목이 왜 기도하는가 였는데, 기도의 목적은 우리를 변화시키려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변화시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설교를 들으면서 예배당을 둘러보는데, 옆에 앉은 분은 아들이 죽고, 딸은 심하게 다치는 교통사고를 당한 뒤로 완전히 새 사람으로 변했고, 뒤에 앉은 분과 통로 건너편에 앉은 분은 암 투병 중에 있었고, 여기저기에 심장병이나 당뇨로 고생하는 사람들, 가족 문제로 마음이 상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날 목사님의 설교는, 기도가 우리의 상황을 즉시 변화시키지는 못하지만 우리를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고난을 견디게 하며, 새로운 삶을 살게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켄터키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은,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미래의 모든 꿈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 같았는데, 그녀가 살고 있는 도시에는 남미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많았고, 그래서 그들을 위한 선교의 새로운 꿈을 가지게 되었고, 그녀의 헌신을 통하여 교회는 새로운 기독교인으로 가득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녀의 고백은 남편이 죽었을 때는 모든 꿈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새롭고도 놀라운 인생을 준비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2. 저는 이러한 내용을 읽으면서 생각하기를, 교회란 영광을 자랑하는 곳이 아니라 주님이 오실 그날 까지 고난 가운데 서 있는 교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도 많은 사람들이 고난 중에 있습니다.
질병으로 고통하는 사람과 가족들, 직장을 잃은 사람들, 돈을 잃은 사람들, 자녀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 인간관계에서 오는 상실감과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여러 종류의 고난과 고통이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작년 우리 교회의 25주년의 기념일에 저는 설교 제목을 광야 길 25년이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기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쳐 지나가는 이민 사회이고 보면, 우리 교회는 온갖 사람들이 온갖 문제와 고통을 안고 몸부림치다가 또 다른 곳으로 그림자처럼 사라져 가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고난 속에서 주님을 만났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주님의 손을 잡고 다시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그런 세월 속에 목회자로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이 교회에 셀 수도 없는 많은 능력과 기적들을 베풀어 주셨지만, 그 모든 것이 우리로 하여금 영광을 누리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 오실 그 날까지 변함없이 이 고난 가운데 서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 뒤에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듯이 우리에게는「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롬8:18)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장차 받을 영광을 위해 지금의 고난을 인내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교회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받아야만 하는 고난을 거부하고 이 지상에서 성급하게 영광을 먼저 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3.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의 자랑거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자랑거리는 자신의 능력이나 소유나 남다른 것이 아닙니다.
한결같이 자신의 연약함, 자신의 무능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도 로마 시민권을 포함한 그의 출생이나 바리새인이라는 종교적 지위와 가말리엘 학문이라는 세상적 자랑들이 많았습니다마는, 그는 이 모든 것을 도리어 배설물처럼 여기면서, 복음으로 인해 드러난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것은, 바울은 사람들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자랑해서는 안 될 것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것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시시하게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거짓 교사를 용납한 이유가 바로 그들의 세상적인 자랑, 그들의 세속적인 화려함과 과장된 웅변에 있었던 것입니다.
중세 기독교가 이방신에게 제사하는 사람들의 풍습을 따라 교회를 웅장하고 화려하게 치장하여 그 권위를 높이려 할 때, 교회는 고난을 버리고 세상의 영광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님이 온 인류를 위해 자신을 고난의 십자가에 내어 줌으로 죽음을 통해 마침내 부활의 영광에 이르심같이 자신도 주님을 본받아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했고, 이 연약함으로 말미암은 자신의 고난을 부끄럼 없이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그는 살 소망까지 끊어질 정도로 고난의 밑바닥 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 속에서 사람이 아닌, 세상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유일한 소망임을 알게 되었고, 그 고난 속에서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도「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4. 주님의 몸된 교회란, 누군가의 희생이 없이는 받은 이 생명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은, 그 희생이란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형태의 사랑이라는 것도 누군가의 희생이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학자들이 원숭이를 가지고 실험을 했습니다.
수놈과 어린 자식을 한 통에 넣고, 다른 곳에 암놈과 어린 자식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불을 놓기 시작했는데, 바닥이 점점 뜨거워지자 숫놈은 제 새끼를 깔고 앉았고, 암놈은 새끼를 머리에 얹고 있었다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의 구성원이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대한 남다른 사랑은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뛰어 납니다.
우리 교회도 봉사하는 것이나 순종하는 것이나 헌금에 있어서도 남자들은 여자들 을 못 따라갑니다.
교회는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세워졌습니다.
아들을 희생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말미암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그 고난 속에서 구원의 십자가를 붙들면, 사도바울이 체험한 바로 그런 주님의 놀라운 위로와 도우심을 체험할 줄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지상의 교회는 세상 종말에 이르기까지 영광의 자리가 아닌, 반드시 고난 속에 서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5. 바울은 바로 이 고난 속에 서 있는 교회를 위해 인생의 끝도 없는 밑바닥에 까지 내려간 사람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알아주든 말든 그는 그 교회를 사랑했고, 그 성도들을 위한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아니한 것은, 고난 속에서야 말로 교회가 주님의 몸 된 교회로서의 진정한 사명과 그 기능을 다 할 수 있음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자랑은 육체를 따르는 자랑이 아니라, 23절 이하에 나오는 복음으로 인한 고난과 십자가로 말미암은 연약함을 자랑한 것입니다.
로마의 클레멘트의 기록에 의하면, 바울은 7번이나 옥살이를 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의 고난과 희생이 잘 묘사되고 있지만, 고후1:8-9절을 보면,  그는「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으로 「살 소망까지 끊어진」그런 상황을 표현하기를, 「사형선고」를 받은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환란과 그런 고통 속에서 바울이 체험하고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고후1:9)는 것이었고, 어떤 상황 어떤 조건 속에서라도 하나님은 전도자들을 능히 구원하시는 분임을 확실히 믿고 체험한 것입니다.
이 지상의 교회는 지구촌 한 모퉁이에서 자기들만의 잔치인 주님의 영광을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고통 속에 있는 이 지구촌을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주님이 남기신 고난의 발자취를 밟으며 그들을 앞서 가면서 하나님 살아계신 것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 교회가 받은 사명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28절에「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 바울의 염려는 어디서 온 것입니까? 불신앙입니까? 불필요한 근심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의 염려는 다름 아닌 주님의 몸된 교회를 향한 진실한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왜 염려합니까? 교회가 고난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라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여전히 찢기고 깨지고 밟혔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이 성장할 때 까지 염려하고 돌보아야 하듯이, 바울은 어린 자식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교회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날마다 눌렸던 것입니다.

6. 바울은 복음을 위해 세상 자랑된 것은 다 버리고 도리어 고난을 선택했습니다.
39대의 매를 다섯 번 맞았다고 했습니다.
이 매를 맞다가 많은 사람들은 도중에 죽는다고 합니다.
그는 3번의 태장을 맞았다고 했습니다.
채찍 끝에 납을 붙여 치는 형벌로 고통을 견디지 못해 도중에 죽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합니다.
한 번 돌로 맞은 것은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많은 돌팔매질로 인해 죽은 줄 알고 사람들이 그를 성 밖에 내다 버렸다고 했습니다.
이 외에도 파선과 강도와 주리고 목마르고 자지 못함과 헐벗음을, 바다면 바다의 위험을 육지면 육지의 위험을, 사람이면 사람의 위험, 동족 유대인의 위험 등등, 그의 평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이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한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인내했기 때문입니다.
  
7. 우리가 교회를 사랑한다면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교회가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구원받은 그들을 변화시키려면, 성도들의 사랑의 희생은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교회가 복음의 사명을 다 감당하려면 이 일을 위해 목숨을 내 건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주님의 몸된 교회와 이 믿음의 공동체를 위해 고난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면, 고난 속에 있는 연약한 우리들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이 지상에서 그 어떤 영광도 누릴 때가 아닙니다.
밭에 나간 일꾼이 해가 지기 전에는 쉼터가 있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땀 흘려 일하듯이, 우리는 지금 쉴 때가 아니며, 자신의 안일만을 돌아볼 때가 아니며, 어떤 사람들처럼 자신의 성공을 자축하고 잔치 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교회가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교회로서, 우리의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우리의 신앙과 영적 유산을 물려 줄 수 있는 그 날까지, 고난을 두려워 말고, 그 고난 속에 몸을 던져 희생함으로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다름 아닌 복음으로 말미암은 고난의 현장에 주님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이며, 바로 그곳에서 이미 많은 고난과 아픔을 당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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