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17.바른 관계(고린도후서7:2-4)

[성경본문] 고린도후서7:2-4개역개정

2.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3.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4.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제공: 대한성서공회

바른 관계(고린도후서7:2-4/2010.1.17.오전)
1. 로마의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놀라는 것은 그들의 조상들이 남긴 유적들이다. 유럽 전역으로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간 곳마다 돌로 만든 거대한 건축물들이 당시의 그들의 면모를 대변해주고 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놀라는 것은 고대 로마인들은 의외로 짧고 왜소하다는 것이다. 로마군인들이 가진 칼이 단검이고, 그들이 입은 옷이 짧은 치마이며, 키가 150센치대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의외였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기록하기를,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나 게르만족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칼타고 사람들에 비해 뒤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중해를 낀 유럽 세계의 승자로 가장 넓은 영토에 가장 강력한 힘을 소유한 천 년 제국을 소유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들이 21세기 지구촌에 남긴 것은 유적이 아니라 문화를 존중하고 사회 질서의 확립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만든 법과 제도에 충실하였고, 준법 정신에 뛰어났으며 원칙을 지키며, 심지어 점령한 적조차도 말살시키지 않고 융화시킴으로 새로운 로마인으로 만들어갔습니다.
최근의 일본 정치나 경제적 동향과 그에 반응하는 현실을 보면서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일본에 대한 염려가, 사람들에게 염려를 넘어 불안과 두려움을 주고 있을 정도로 미래가 불투명한 상태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명과 영혼을 하나님께 위탁하고, 영원한 미래를 기약하며 살아가는 이 영적 공동체인 교회는 어떠합니까?
과연 21세기 격동기를 넘어 교회가 새로운 미래에도 살아남아 이 지구촌의 문명과 정신과 종교적 생명을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대부분의 문제는 그 문제가 일어난 현장에 해법이 있고 해답이 있듯이, 주님의 몸 된 교회 역시 미래에 대한 바른 대답은 교회 안에 있을 뿐입니다.

2. 이미 여러 번 언급하였지만, 고린도후서는 고린도교회 안에서 일어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바울이 기록한 편지다.
사도바울은 부모와 같은 심정과 자세로서 고린도교인들을 사랑했고, 그들에게 신앙적인 모범을 자신의 삶을 통하여 보여주면서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떠난 이후에 유대교 주의자들과 비복음적 교사들로 말미암아 고린도교회는 율법주의와 비도덕적인 문제에 빠지면서, 바울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의 사도성에 대한 의심이며, 고린도교회를 향한 사랑이 없다는 말과, 거두어간 헌금에 대한 도덕적인 의구심 등으로, 목회자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키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준 것은 분쟁과 오해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었습니다.
정말 부모와 같은 심정으로 고린도교회를 세우고 사랑하고 헌신했지만, 세월이 지나 돌아온 것은 말로 인한 오해와, 편견으로 인한 공격이었습니다.
원래의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훌륭한 가르침과 모범적인 신앙의 삶을 통하여 복음 위에 세워진 교회였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내부적으로 사분오열 되면서, 영적으로는 심각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올바른 복음 선포가 사라지고, 그로 인하여 말씀 공급이 중단되었기 때문입니다.

3. 육체가 굶주리면 영양공급에 균형이 깨지면서 몸의 사방에서 질병이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제 때에 공급받지 못하거나 잘못된 가르침에 빠지기 시작하면, 영혼도 병들기 마련이고, 그 병든 영혼을 사단은 도구로 삼아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유대주의자들과 이단적 사상을 가진 교사들로 인한 결과는, 교회의 분열과 더불어 영적인 아버지인 바울을 향한 공격과 부도덕한 삶에 대한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의 그 근본은 하나님을 떠남에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은 곧, 더 이상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이요, 말씀을 더 이상 듣지 못한다는 것은 영적인 결핍인 동시에 불순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힘과 능력을 공급하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축복과 회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을수록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되고, 말씀에 순종할수록 은혜와 축복이 넘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말씀을 들으면, 자신을 알게 되고, 인생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함을 알게 되고, 들은 말씀이 내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함으로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4. 사실 신앙 공동체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 함께 죽어야 함께 사는 길이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내 한 사람의 자아가 죽고, 고집이 죽고, 욕심이 죽을 때, 모든 사람이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공동체가 어려움을 당해도 기쁨이 있고, 위로가 있고,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2절에서,「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고 했는데, 이것은 너희 마음속에 우리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 그곳에 우리를 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굳게 닫힌 성문은 물리적인 힘으로 열 수 있지만, 한 번 닫힌 사람의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미 6장13절에,「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했으니, 그만큼 고린도 교인들이 잘못된 생각을 받아들여 바울에 대하여 마음 문을 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고린도교인이 마음의 문을 닫고 빗장을 걸만큼 사도 바울이 문제 있는 사람이었는가? 과연 고린도교회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었습니까?
바울은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리기 위해서 자신의 변명을 2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같은 목회자의 입장에서 당시 바울의 심정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앙의 공동체를 위협하는 것은 재정적인 부족이나, 일군의 부족함이나, 외부적인 핍박이나 신학적인 결핍이 아니라, 말로 인한 오해, 편견으로 인한 오해로 인해 발생하는 분열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마음을 열라고 했고, 그 마음속에 전도자된 우리들을 맞아들일 만한 장소를 만들어 달라고 한 것입니다.

5. 현대 크리스천들이 앓고 있는 질병이 있다면 그것은, 회개가 없는 것입니다.
지난 잘못을 가슴을 치며 세리처럼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부터 잘하면 되었지 하는 마음입니다.
회개 없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고 하고, 회개 없이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겠다는 담대한 마음이 문제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겸손이 사라지고 위장된 겸손 속에 숨은 교만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위기는, 내 자신이 심령을 열고 회개의 눈물로 씻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사람들과는 마음을 열고 이해하고 용납하고 용서를 구함으로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는데 있습니다.
바울의 이상적인 목회상은, 이 고린도교인들과 더불어「함께 죽고 함께 사는」데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 바울의 마음을 갖고「함께 죽고 함께 사는」각오를 가진다면, 부흥하지 못할 교회가 없고, 건축하지 못할 교회가 없고, 선교를 하지 못할 교회가 없을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적어도 말로 인한 오해도 사라질 것이고, 편견으로 인한 잘못된 관계도 사라질 것입니다.

6. 감사한 것은, 사도바울 자신을 의심하고 공격하는 이 고린도교인들을 가리켜 바울이 표현한 말이 1절에서,「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당시 바울 자신의 형편은 5절 이하에 보면 내우외환, 사면초가였습니다.
자신은 외부로 부터의 많은 공격과 친 자녀같은 고린도 교인들의 오해와 비난까지 받으면서도, 그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침은 여전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로보건데, 바른 관계란 어떤 외적인 환경이나 조건으로 인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태도, 확신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부모 마음을 섭섭하게 해도,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바울은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면 비난 받아 마땅한 고린도교인들의 태도에 개의하지 않고, 여전히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듯이 그들을 사랑하고 그 관계가 회복됨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살펴 보고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는 확신하고 있습니까?
흔히 하나님의 사랑을 가진 소유에서 보며, 소유의 많고 적음을 따라 하나님의 사랑을 평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관계, 축복된 관계는 그런 것이 아니라, 환경과 조건을 초월한 변함없는 사랑에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변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함이 없는 분이시며,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문제는 시간이 가도 변화되지 못하는 우리가 문제입니다. 왜? 우리가 변해야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변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입니다.

7. 그러므로 오늘부터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첫째로, 예배 중심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듣고 배우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영혼을 사랑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바울이 복음전파에, 특히 자기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에 자기의 영혼을 내어 놓을 정도로, 내 속에서도 그런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 탈 수 있도록.
셋째로, 교회 중심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려움 당하고 실패를 해도, 누구든지 교회로 오면 위로가 있고 소망이 있고,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그리고 믿음의 공동체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는, 우리를 반드시 세상은 물론이고 내세에도 영원한 성공자가 되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이런 바른 관계야 말로, 주님의 몸 된 오사카 중앙교회의 교회의 큰 능력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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