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2.21.구유에 누인 아기(누가복음2:8-14)
[성경본문] 누가복음2:8-14개역개정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 구유에 누인 아기(누가복음2:8-14/2008.12.21.오전) 1. 예방 의학의 권위자인 피터 한센은 건강에 관하여 말하기를 몇 가지 조심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적당한 음식을 먹어야 하고, 둘째는, 적당히 운동을 해야 하고, 셋째는, 나쁜 습관을 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쁜 습관이라고 한다면, 술 담배, 그리고 화내는 것, 게으름 피우는 것 등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건강하게 살수는 없다고 합니다. 나머지 50%의 건강의 절대 조건이 따로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피터 한센은 사랑을 주고받는 것은 도덕적인 문제 이전에 건강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과연 인간은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 존재요, 인간의 모든 문제는 사랑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렌드 스탠포드라는 캘리포니아 상원의원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도 엄청난 부자로 알아주는 사람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명망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 사고를 당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인생의 살 목적을 잃어버리고 고통하고 있는 중에, 꿈에 죽은 아들이 나타났습니다. 슬퍼하는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이 세상에는 아들들이 많고, 젊은이들이 많으니 아버지는 제 대신 이 사람들을 사랑해 주세요」하였습니다. 그는 결심하고 재산을 다 털어서 스탠포드라고 하는 유명한 대학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는 참으로 자기의 아들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부모님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의 사랑, 그리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모두 희생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은 전부 누군가의 진정한 희생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이미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깨닫고, 이 사랑의 능력으로 아름답고 복 된 성탄절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바랍니다. 2. 로마의 초대황제인 아구스도는 로마 대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인구조사의 목적으로 호적령을 내렸고, 많은 사람들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그들의 조상인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이미 각지에서 몰려든 많은 사람들로 인하여 숙소를 마련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마구간에 자리를 잡아야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슬프고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미가 선지자의 예언대로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고통스러운 여행 속에는 하나님의 중대한 섭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 땅의 메시야로 오시는 주님이 왜 마구간에서 나야 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어려운 여행길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면, 이 마구간의 출생 역시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국이나 다른 좋은 환경 속에서 탄생하실 수도 있지만, 그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소명, 즉 메시야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가장 비천한 곳에서 출생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장 비천하고 가장 불쌍한 죄인까지도 다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이 지은 그 어떤 죄도 다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이 처한 그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다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메시야되신 우리 주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고후 8:9절에 보면,「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그는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자신의 부귀, 자신의 권리, 자신의 능력까지 포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3.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출생에서부터 가난으로 시작하여 비천함과, 헤롯의 핍박과 애굽으로의 피신으로 이어지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죄인들과 고통하는 자들과 더불어 함께 하시면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이 사랑을 위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시고 모든 것을 포기하신 후, 십자가에서는 자신의 몸까지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말구유에서 시작된 그 분의 인생,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종결하신 33년의 생애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그 분의 낮아지심입니다. 연약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스스로 낮아지고 이처럼 비천하신 모습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참 사랑은 희생하는 것이요, 생명의 구원은 그 분의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필립 안시라는 사람이 자신의 저서「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나는 죄인들과 시간을 보내고. 유명한 종교인들과 교류를 나눈 후에야 비로소 왜 예수님이 오랜 시간을 죄인들과 함께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고 했습니다. 죄인들은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고 허세가 없기 때문에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지만, 성자들은 잘난척하고 예수님조차도 판단하며, 도덕률의 함정에 예수님을 빠뜨려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포박하고 죽음에 내어준 것은 죄인들이 아니라 종교인들이었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자리까지 내려 가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것이 없을 때까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셨고 모든 것을 희생하셨습니다. 4. 기독교의 구원이 무엇입니까? 기독교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강함이 아니라 연약함입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 이 모습은 너무나도 비천하고, 너무나도 연약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 자체가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12)고 했습니다. 왜 이런 모습이 표적일 수 있습니까? 구유에 누인 아기의 모습이야말로 하나님이 죄인된 우리를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자신의 능력으로 세상을 구원하고 자신의 큰 권세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연약한 모습으로 다 빼앗기고 다 잃어버린 자의 모습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히5:7)고 하였으며,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다(5:8)고 했습니다. 주님은 33년 동안 가장 낮은 곳에서 죄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우리 인생들의 아픔과 눈물과 가난함을 체험하셨습니다. 이런 체험을 통하여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5. 문제는 오늘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연약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는데, 우리는 연약함을 싫어합니다. 약함보다는 강한 것을 좋아하고, 실패보다는 성공을 원하고, 낮아짐보다는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려고 합니다. 기도 속에서도 내 소원을 이루기 원하고, 남들보다 더 많이 벌고, 더 많은 것을 얻게 해 달라고, 건강한 육신을 위해, 자녀들의 형통함을 위해 기도하면서, 주님의 약한 모습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나 할것 없이 연약함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넘어지고 깨어지고 있습니다. 신앙 생활도 지금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믿음도 부해지고 강해지고 성공하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이름은 원해 사울 이었습니다. 사울이란 큰 자란 뜻입니다. 과연 그는 크게 살았습니다. 얼마나 기세가 당당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로는 사울이 아니라 바울로 바뀌었습니다. 바울이란 뜻은 작은 자란 의미입니다.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라 정말 작은 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통하여 복음을 받을 뿐만 아니라, 겸손하고 낮아지신 예수님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를 만나려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헤롯왕과 왕궁에 모인 사람들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로 인하여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베들레헴을 찾아오지는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너무 높이 올라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6. 기독교 안에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숨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약함의 능력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능력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고,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정말 능력 있는 삶을 살고, 살아있는 믿음, 생명을 구원하는 사명자로 살기 원한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가던 길을 돌아서 지금부터는 내려가야 할 것입니다. 사도바울 뿐만이 아니라 주님을 만난 자들은 한결같이 세상을 향한 꿈을 접었습니다. 이유는 세상이 가는 길은 끊임없이 올라가고, 크게 성공하고, 한없이 소유하고, 남들보다 앞서가는 길이요, 그 결국은 멸망으로 끝나는 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에는 그 분이 누우실 자리도 없었는데, 교회는 찾아오지만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조차 기득권을 주장하고, 남들을 다스리고 행세하려고 합니다. 베들레헴에 가면 예수 탄생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들어가는 문은 너무 좁고 낮았습니다. 이유는 몸을 굽히지 않으면 아기 예수를 경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을 높이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사람들은 내게로 모이게 할 수 있을 것이나, 주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7.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이 경제적 위기로 많은 신자들도 교회도 어려움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교회의 원형이라 불리는 예루살렘교회는 은과 금은 없었지만,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치료하고,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큰 능력으로 충만했습니다. 핍박이 일어나자 성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가서 그곳에서 함께 모이고 기도하고 복음을 전함으로 큰 부흥의 역사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은과 금은 풍성한데 복음의 능력, 사랑의 능력은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참 능력은 강함이나 풍성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약하고 부족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울에게 몸의 가시를 주셨고, 제자들도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지만 얻은 것이 없는 그 아침에 주님을 만나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렸을 때 풍성함이 임했습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 이 모습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고, 표적이고, 죄인을 향한 사랑의 증거입니다.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여러 환경과 조건은 도리어 하나님의 참 사랑의 증거인 줄 믿습니다. 낮아지는 자에게 주님은 가까이 하시고, 부족함을 깨닫고 엎드리는 자에게 주님은 긍휼을 베푸시고, 그런 우리에게 세상이 깨닫지 못하는 능력과 사랑으로 충만케 하시는 줄 믿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