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3.9.택자의 은총(마태복음 26:69-27:10)
[성경본문] 마태복음26:69-75개역개정
69.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5.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 택자의 은총(마태복음 26:69-27:10/2008.3.9.오전) 1.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일주일을 우리는 고난주간이라고 부릅니다. 이 한 주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예루살렘에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도 엄청난 숨 가쁜 역사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첫날은 예루살렘성에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셨고,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하나님을 찬미하고, 이 예수님을 환영하며 영접하였기 때문에 이 날을 종려의 날이라고 합니다. 안식 후 첫 날이기 때문에 오늘의 주일에 해당하는 날입니다. 둘째 날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시면서 하나님의 집을 정화하셨습니다. 셋째 날은 유대인이 받을 심판과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시는 등, 가장 바쁜 하루를 보내신 날이었습니다. 넷째 날은 베다니로 물러가서 종일 쉬시면서 그의 공생애의 마지막을 준비하셨습니다. 다섯째 날은 제자들과 더불어 만찬을 나누시면서 그들의 발을 씻기시고, 제자들에게 마지막 이별의 설교를 하셨으며, 그날 밤에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인 가롯유다의 배신이 있었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과 피와 눈물로 밤을 새우시면서 기도하시면서, 할 수만 있다면 이 십자가의 고난을 받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여섯째 날은 잡히시고 심문을 받으시면서 온갖 모욕과 아픔을 당하신 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오늘날의 금요일에 해당합니다. 일곱째 날은 예수님의 시체가 무덤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새벽에 주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2.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베드로와 가롯유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26:56절을 보면,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고 했습니다. 더 그슬러 올라가면, 26:35절에서는, 예수님이 자신의 받으실 고난을 말씀하시자,「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였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제자들 중에 누구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다 고난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버리고 도망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경 어디에보아도 그런 제자들에게 섭섭한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고, 도리어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평생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속임을 받으며, 억울한 일을 당하며, 섭섭하고 괴로운 일을 당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당하고 손해난 것을 되돌리려고 싸움도 하고, 복수와 원수 갚는 일도 서슴없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잠잠하셨습니다. 반항하지 않으셨습니다. 변명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주간의 다섯 번째 날인 유월절 만찬에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너희도 이와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 심령에 넘치면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넘치면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3. 더 나아가서 우리가 살면서 사람을 너무 믿으면 반드시 싸움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모양인데 우리라고 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저 사람이 배반한다면 나도 배반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했다면 우리도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믿는 대신에 예수님만 믿으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이란 사랑과 용서의 대상이 되어야지 우리의 믿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남을 믿는 대신에 용서하고 베풀고 사랑하고 이해한다면, 더 이상 우리는 배신을 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가롯 유다가 배신할 것을 잘 아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하고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갈 것도 아셨습니다. 저들의 그런 행동이 3년간 동고동락 해왔던 예수님과의 관계가 일시에 무너져 내리고 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다시 그들을 찾아 오셨고,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명을 주셨으니 곧 땅 끝까지 이르도록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또한 성령을 선물로 보내 주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그렇게 하셔야만 했습니까? 바로 이것이 택함 받은 자의 누리는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는 영영 망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실패하고 무너져도 주님이 다시 찾아오시고 힘주시고 새롭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까지 예수님을 떠나지 아니하고 그의 은혜와 사랑의 그늘아래서 믿음을 지키며 감사하며 살아온 것은 내 힘이나 나의 의지가 아니라 전부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한 사람도 낙오됨이 없이, 앞으로도 끝까지 믿음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고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으로 은혜의 삶을 사는 줄 믿습니다. 4. 그런데 오늘 본문에 베드로와 유다가 나옵니다. 먼저,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그냥 배신한 것이 아니라, 노예 몸값에 해당하는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통째로 팔아먹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무죄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 철저하게 예수님을 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가롯유다는 뒤늦게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악한 자들도 때때로 자신의 행위가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배신행위에 대하여 스스로 심판하며 자학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롯유다는 제사장들에게 다시 찾아가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아 죄를 범하였도다」하면서, 자신의 배신행위를 취소하고 되돌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보다 더 완악한 종교지도자들은「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행위가 돌이길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을 깨달은 가롯유다가 마지막 택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목을 메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일본을 가리켜 자살 천국이라고도 합니다. 인구도 많지만, 일 년에 3만 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사안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가롯유다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결과가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 사람들도 자살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5. 그러나 우리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은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감사하면서 행하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염려하는 대신에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짐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하셨고,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고 하셨던 것입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어 내 힘으로 감당하지 못하는 일을 만났다면, 이 순간부터라도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가롯유다는 바로 이것, 돌이킬 수 없는 위기 상황을 믿음으로 맡기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을 메고 말았습니다. 목메는 것은 하나님 없는 사람의 최후의 수단일 뿐입니다. 그러나 믿고 맡길 때 큰 능력과 은혜가 임하고, 큰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6. 예외 없이 제자들이 다 달아나 몸을 숨기고 있는 그 시각에, 베드로는 용감했습니다. 예수님의 결말이 어떻게 날 것인지 궁금해서 도망하는 대신에 적당한 간격을 두고 따라 다녔습니다. 그리고는 재판의 시종을 침묵하며 지켜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광경을 주목하고 있을 때, 그들 중에 한 사람, 즉 예수님과는 전연 관계도 없는 사람처럼 위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곧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대제사장의 어린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애써 부인 하였지만, 또 다른 종도 그를 알아보고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베드로가 칼을 들어 귀를 잘라버린 말고 라는 사람의 친척이 또 베드로를 알아 보고 예수와 같은 당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베드로는 아무리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가끔 보면, 교회 다니면서 자신의 신앙을 숨기고 행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겠지!!, 이 정도로 위장하면 사람들이 몰라보겠지!!.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우리가 믿는 사람이라면 세상 사람들과 분위기가 다르기 때문에 어디를 가도 쉽게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면서「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마5:14-15)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된 우리는 과거에는 어두움 속에 있었고, 숨겨진 존재였지만, 에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모든 세상에서 드러나고, 밝혀지고, 보여지는 존재로 변화된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디서 나를 위장하고 숨기는데 성공했다면, 내 정체를 의심해야 합니다. 정말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가? 내가 집사인지 잡사인지 의심해야 합니다. 어디 가든지 복음을 전하고, 어디에 있던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과 은혜와 감화를 줌으로 우리는 세상에 빛으로 드러나는 존재로 결코 숨기어질 수 없습니다. 7. 베드로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온갖 몸부림을 다했지만, 더 이상 자신을 숨길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당면한 위기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취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26:74)했습니다.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공부 잘 하는 아이가, 겨우겨우 서울에 유학와서 공부하는데 공부를 잘 하다 보니 남녀 친구들이 많습니다. 하루는 시골에서 부친이 학비를 가지고 올라왔는데 친구들이 보고 누구냐고 묻자 시골집의 머슴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위해 소도 팔고, 얼마 안 되는 논밭을 또 떼어 팔면서 아들의 성공을 위해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하는 아버지가 아들의 체면 때문에 시골 머슴 취급을 받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죄와 허물을 위해 십자가로 나아가시면서, 온갖 수욕과 아픔을 당하고 계시는 주님 곁에서 자신의 신변 안전을 위해 그 예수님을 부인하다가 마침내는 저주하고 말았습니다. 과연 이런 제자를 용서할 만한 스승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불과 하루 전만 하여도 주님을 위해 죽기로 맹세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바로 그 시간에 닭이 울기 시작했고, 이직도 베드로가 자신의 살 방도를 생각하고 있는 그 시간에 우연치고는 너무도 충격적으로 예수님의 눈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누가복음 22:61절에 보면「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여전히 인자하신 눈빛으로 베드로를 돌아보시는 주님과의 마주침과 동시에 닭이 울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이 생각나면서, 베드로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고, 마침내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쓰라리고 아픈 눈물을 흘리면서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8. 우리는 베드로나 유다처럼 그리고 다른 제자들처럼 주님을 버리고 배신하는 상황에 빠지지 않고, 믿음을 지키며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가롯유다와 베드로가 함께 배신했는데, 왜 가롯유다는 자살함으로 영원히 저주받은 존재가 되었고, 베드로는 왜 위대한 사도로 회복할 수 있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그 답이 눅22:31-3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 모든 상황을 미리 아시고, 미리부터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롯유다를 위하여 기도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도리어 그를 위하여 하신 말씀은,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26:24)고 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택자의 은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입은 은총의 자녀는 환란과 고통 속에서도 도우심을 입고,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위로와 은혜가 넘치며, 그 환란과 고난 후에는 더 큰 은혜와 축복이 넘치는 줄 믿습니다. 구약에서는 이삭의 두 아들인 야곱과 에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택자 은총을 보여주셨고, 이 신약에서는 베드로와 가롯유다를 통하여 다시 한 번 우리에게 택함 받은 자의 은총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고난 중에라도,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시면서도 사랑하는 제자를 돌아보셨고, 부활하신 후에도 그들을 찾아 오셔서 실패했던 그들에게 새 힘주시고, 소망주시며 위대한 사도가 되게 하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새 힘과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더욱 귀하게 쓰임받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