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5.11.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고린도전서 13:4-7)

[성경본문] 고린도전서13:4-7개역개정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고린도전서 13:4-7/2008.5.11.오전)

1. 오월은 가정의 달이고, 오늘은 한국교회가 어버이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현대 가정의 문제가 어제오늘의 문제는 아니지만, 날이 갈수록 사람들의 마음이 황폐해 지고 있고, 이로 인하여 가정붕괴의 현상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요,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기장 기초적이면서 가장 오래된 조직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의 형상을 따라 만드시고, 아담과 하와를 사랑으로 한 몸이 되게 하시고, 그들을 축복하여 만드신 것이 가정이라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어디가 잘못되었고, 무엇 때문에 가정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들이 떠났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모든 것을 누리고 소유하고,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환경과 조건 속에 있었지만, 행복할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복되지 않으면, 가정은 물론이고 이 인류에게는 더 이상 나아갈 길은 없습니다.
미얀마가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태풍 피해를 받고도, 독재정권이 문호를 개방하지 못함으로, 전 세계에서 우리의 도움을 제발 받아달라고 애원을 해도,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습니다.
그 안에 있는 백성들은 한 마디로 말해서 군사정권의 노예와 다름이 없습니다.
어디서 잘못되었습니까?
정권 잡은 자들에게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사랑이 없다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2. 그런데 우리가 사랑하면, 흔히 생각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오고 가는 사랑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의 형편을 보더라도 성경이 말씀하는 근본적인 사랑이 무엇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주님의 몸이고, 성도 개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믿음의 공동체로서 주님의 몸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이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의 사랑의 최종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주님 사랑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입니다.
더욱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도 그렇게 합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자신과 관계된 지연, 혈연, 학연, 동포 등등의 관계를 가진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하고 이해하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자기와 관계도 없는 사람들까지도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고 있는 사랑의 궁극적인 대상과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3. 지난주에 우리가 1-3절을 통하여 살펴보았듯이, 온갖 능력과 은사, 기적을 일으키고, 자신의 생명까지 불살라 내어준다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고린도 교회는 많은 은사와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결정적인 문제점은 성도간에 서로의 사랑이 결핍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과 은사와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가 빠져 있었습니다.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고, 능력을 행하면서도 그 가운데 가장 귀한 것,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행하던지 전부 자기를 위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은사와 능력을 주신 주님의 목적과 의도와는 상관없이 한결같이 자기 사랑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이웃 사랑은 물론이고, 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을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15가지의 사랑의 열매, 혹은 사랑의 실천적인 것들을 아무리 강조한다고 하여도 다 소용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아무리 오래 참아도 그것은 사랑이 될 수 없는 것이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온유한 성품도 사랑이 될 수 없는 것이요, 자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입을 다물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이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4. 그러면 고린도 전서 13장 전체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인 되었던 우리를 위하여 하늘의 영광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가운데서 섬기신 예수님,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루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찢고 한 방울의 피도 남기지 않고 다 흘리시고 죽으신 주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여 이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게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각양 좋은 은사와 능력과 축복을 한없이 부어주시는 이 주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과연 그 분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무엇인가를 기록한 것이 13장의 말씀입니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우리의 아픈 상처를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싸메시고, 집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우리를 기다리시며, 우리가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눈물을 흘릴 때에도 함께 그 짐을 져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때 안심하게 하시고, 우리가 방황할 때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고, 주리고 목마를 때 선한 목자처럼 우리를 맑은 시냇가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러한 주님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 분을 위해 오래 참았습니까?
그 분을 향하여 원망 불평이 아니라 온유함으로 받아들였으며, 그 분 앞에 교만하고 자랑하지는 않았습니까?

5. 사람들이 볼 때에도 정말 저렇게 하면 하나님 앞에 벌받지!!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무례하게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를 우리 모두가 함께 하는 공동체로 인식하기보다는 자기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나 많은 순간에 더럽고 악하고 사악한 생각들을 반복하였습니까?
왜 우리가 주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교회 안에서조차 이렇게 해야 합니까?
답은 하나뿐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교회서 청소하고, 부엌일에 수고하고, 꽃을 장식하고, 전도하고, 섬기는 모든 행동을 할 때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도리어 많은 순간에 내 믿음을 인정받으려고, 내 능력을 자랑하려고,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드러내려고, 그래서 인정받고 자랑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자기만족을 위해 은사를 사모하고, 내가 만족하면 주님도 기뻐하실 것이라고 착각하고, 자기모순 자기 애욕에 빠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6. 지난주간, 새벽기도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사야 20장에서,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도 3년간이나 그렇게 살라고 하십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에게는 최고의 스승이요 능력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벌거벗은 몸으로 다니는 선지자를 바라보는 예루살렘 거민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런 명령을 하셨습니까?
바로 이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와 허물로 인하여 당할 장래의 수치를 미리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벌거벗고 다니는 이 선지자의 모습을 보고 깨닫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전대미문의 명령을 받은 선지자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것도 3년간을 꼬박 그렇게 순종한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경험해 보지도 못한 이상한 하나님의 말씀에, 그것도 1095일간을 반복하며 순종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애절한 사랑이 바로 여기에도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사랑을 입은 이 선민들이 더 이상 자신들의 죗값으로 수치와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은 선지자 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 수치를 대신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왜? 라는 말 한마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백성들은 끝까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7. 오늘날 내게 하나님이 그런 명령을 내리신다면 내가 순종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불가능합니다. 왜 그렇게 단언할 수 있습니까?
이사야 선지자에게 명하신 그런 명령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명령, 간단한 말씀에도 온전히 복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뻔뻔스럽게 할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에 가기를 소망했으니, 저야말로 주님 사랑하는 마음은 버리고, 주님이 대신 지라고 주신 십자가도, 사명의 삶도 외면하고 하늘나라의 영광만 바라보았으니 저야말로 순종의 대가조차도 치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거저먹으려 했던 죄인의 괴수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가 오래 참는다고 그것이 주님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성품이 남들보다도 온유하다고 해서 주님을 닮아 가는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겸손한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다고해서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심같이, 우리도 주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오래 잘 참다가도 순간적으로 폭발하기를 잘합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나 후회를 많이 합니까?
그렇습니다. 오래 참다가도 폭발할 수도 있고, 온유한 가운데 때때로 성질이 괴팍해질 수도 있습니다. 남을 돕기보다는 도리어 더 많은 도움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8. 정말 우리가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주님의 사랑과 은혜와 그 위에 능력과 축복가지 받아 살면서, 정작 내게 모든 것을 주시는 주님을 사랑할 줄 몰랐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수치요, 우리의 고통이며 슬픔이라고 생각합니다.
6절에 보니,「진리와 함께 기뻐하고」했는데, 이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복음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함께 기뻐한다」는 의미인데, 주님과 함께 기뻐하려면 주님의 생각, 주님의 목적, 주님이 원하시는 것에 우리를 일치시키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좋아하시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것, 그것을 내 감정과 내 기쁨에 일치시키지 아니하고는 결코 주님과 더불어 기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가정의 행복, 가정 안에서의 사랑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그것입니다.
우리의 인내함이나 온유함이나 겸손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이 사라졌기 때문에 내 가정에 문제가 오고, 내 자녀들에게 고통이 오고 사업이 어려운 것입니다.
계3:20절에,「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주님과의 사랑이 회복되면 모든 것은 회복될 줄 믿습니다.
잃어버린 에덴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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