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20.종과 자유인(고린도전서 9:1-15)
[성경본문] 고린도전서9:1-15개역개정
1.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3.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4.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5.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6.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7.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13.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15.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 종과 자유인(고린도전서 9:1-15/2008.1.20.오전) 1.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보면, 로마 병사들은 자기가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는 것을 제일 싫어하였습니다.그러나 이미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이 명령을 거부하면 즉시로 사형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불평하면서도 먼 전선에 배치되었지만,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전투에서이기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전투에서 패배한다면 페르시아 인이나 게르만족에게 포로가 되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은 노예가 되어 죽을 때까지 소나 말보다 더 혹사를 당하면서 소망 없이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믿고 세례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모든 것으로 고백하였고,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충성된 마음으로 섬길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늘 충성된 마음으로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몸과 마음이 피곤하고 시험거리나 여러 가지 문제로 믿음이 연약해짐으로 최선을 다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에게는 늘 세상과 마귀에 대한 영적인 전쟁이 있으며, 이 전쟁에서 거듭 패배한다면, 우리야말로 죄의 세력에 붙잡혀 죽을 때까지 죄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 로마시대의 로마군인들과 우리가 다른 것은, 그들은 한 번 전쟁에 패하면, 무섭고도 끔찍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지휘관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황제의 명령이 못마땅하거나, 주어진 환경에 불만이 있어도, 목숨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군사된 우리는 어떻습니까?영적인 싸움에서 패한 자의 말로가 어떤 것인가를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이 싸움에서 거듭 패한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웃음거리가 될 것이고, 평생 무능하고 연약할 뿐 아니라, 주깨로 부터 받은 바 소명, 그 사명에게서조차 버림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 스스로가 아무런 권리도 없는 노예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인이요 그 위에 사도의 특권을 가지고도 스스로를 제어하여 아무런 권리도 행사하지 않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4절 이하에서 사실적인 예를 들어가면서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먹고 마실 권리도 없는 줄 생각하느냐? 우리도 베드로처럼 결혼하여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는 줄로 생각하느냐? 우리도 다른 사도들처럼 그 생활비 전체를 교회에 부담시킬 권리가 없는 줄로 생각하느냐? 그리고 더 나아가서 모세의 율법에도 보장하고 있는 것처럼, 일하는 자가 삯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나와 바나바도 이러한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3.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바울은 이러한 권리나 권한을 다 사용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아직도 연약한 상태에 있는 교회들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한 편으로는 전도활동을 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자급자족을 위하여 개인 사업을 병행하였습니다. 군인이 국가로부터 모든 필요한 것을 무상으로 지원받고, 그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는 것처럼, 그 당시의 모든 사도들과 전도자들처럼 자신도 교회를 통하여 재정적인 지원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13-14절에서,「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 하면서 구약의 사례를 예로 들면서,「이와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 예수님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말씀하신 것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러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고 참는 것은,12절 하반절에 기록된대로,「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리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우선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최대의 권리이며 자랑스러운 것임을 15절에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4. 문제는 바울이 왜 강한 어조를 가지고 자신의 권리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바울의 사도권에 대하여 의문을 가진 자들에 대한 변론과 더불어 또 한가지의 사실은, 8장에서 보면, 바울이 우상의 제물을 논하면서 교회 안에 소위「영지주의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6:12절의 말씀대로 모든 것이 가하다는 것과 우상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입장을 가지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우상제물을 함부로 먹었고, 이것을 본 믿음이 연약한 많은 사람들이 시험에 빠지게 되었고 교회 분쟁의 요소가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영지주의자들은 신앙과 지식으로 얻은 담력을 가지고 자기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지나치게 남용함으로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말았기 때문에 바울은, 그런 권리를 우선하는 것보다 복음을 우선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바른 태도임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인생은 그 당시 다른 사람들에게 비해서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가지거나 누리지 못하는 권리나 특권이 있을 때, 그 자랑과 행세하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면서도 로마 시민권을 소유하였고, 가말리엘 최고의 학문에서 수학하였고, 종교적으로는 최고로 여기는 바리새인 중에서도 최고의 바리새인이었고, 재력이 있는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생각하였고, 빌립보에서는 전도하다가 억울하게 매맞고 옥에 갇히면서도 일절 자신이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를 관리들이나 병사들이 불법적으로 대응하다가는 큰 문책을 당하였는데, 바울은 그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것은, 복음의 진보에 방해가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5. 그러므로 바울은 12절에서「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과 15절에서「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한」것은, 결코 자기 권리의 종이 되어 살지 않겠다는 것이요, 더 아나가서는 오직 주님이 본을 보여주신 그 모범을 따라 살기로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로 그 결심이 강했는가? 15절 중간에「차라리 죽을지언정」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반복하여 말하지만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의 삶은 개인적으로는 자유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에 있어서는, 그 복음의 종된 삶 자체를 기쁨으로 여겼고, 영광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자신의 권리를 쓰지 않고 포기하면 할수록 그는 기뻤고, 그곳에서 진정한 자유인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식이 좀 있다고, 신앙적으로 연륜이 깊다고, 다른 사람들의 가지지 못한 신앙적인 경험이 있다고 그것을 함부로 사용하고 자랑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믿음이 연약하고 아직 성숙하지 못한 영적으로 어린 사람들을 전연 고려하지 않는 행동입니다. 그랗다면 참된 자유란 무엇입니까? 방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절제를 통하여 얻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스스로에게 있는 권리나 능력을 스스로가 제한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자유를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우상의 제물은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으며, 내가 교회에 대한 사도로서의 권리를 행사할 수도 있고 포기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결혼까지도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늘 염려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양심이 약한 자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과, 먹고 마시는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무엇보다도 복음이 자신의 말과 행동 때문에 장애를 받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6. 바울이 소유한 많은 권리와 자유함에 대하여 스스로 족쇄를 채우고 부자유함으로 산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더 많은 사람들을 얻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운동 선수가 눈앞에 다가온 북경 올림픽을 앞두고 맹훈련에 돌입하는데, 이 훈련을 거부할 수도 있고, 눈치보면서 적당히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한다면 경기에서의 승리는 보장할 수 없습니다.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하고, 이 승리를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워서, 원래 주어진 자유함과 특권들과 이익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바울을 비방하면서, 자신들은 정작 남들이야 어떻게 되든지 내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고 내 주장대로, 내 생각과 방식대로 살아가던 당시의 사람들이야말로, 자유인이 아니라 육체의 종으로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남들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특권과 자유함이 있었지만, 도리어 이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복음을 위하여 스스로 예수 십자가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요즘 일본 사회는 가정 안에서 너무나 끔찍한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는데, 가정의 행복, 가족의 사랑이란 내가 가진 권한과 자유를 행사하고 주장하면 할수록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가족 사랑이란 내가 가진 권한을 다 쓰지 않고, 도리어 그들을 위해 희생하고 인내할 때, 내가 쏟은 만큼의 희생과 인내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7. 우리 교회 안에도 보면, 두 종류의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 대하여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주인 의식이 없는 사람들은 교회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예배를 통해 은혜 받고, 사람들 만나 즐기고, 눈치보면서 적당히 움직이면 그만 이라고 생각하고, 부탁하면 마지못해서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인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주님의 몸 된 교회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종이 되기를 자청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에 누가 부탁하지 않아도 스스로 물과 전기와 기름을 아끼고, 교회 구석구석을 쓸고 닦으며, 자신의 물질과 정성을 아낌없이 쏟아 붓고는 그것을 기뻐합니다. 과연 누가 자유인이며 종인지, 그리고 나는 그 어느 쪽인지를 우리 스스로가 잘 알 것입니다. 바울의 자유에 대한 개념은, 사람들의 생명을 복음으로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을 풍성하게 해 주는데 그 가치가 있다고 보았습니다.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우리 자신을 드리면 우리는 죄의 종이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의 백성으로서 받은 바 사명을 위해 스스로 일어서는 영원한 자유인이 되는 줄 믿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