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4.등불을 가져오는 사람(마가복음4:21-25)

[성경본문] 마가복음4:21-25개역개정

21.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22.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3.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24.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25.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제공: 대한성서공회

등불을 가져오는 사람(마가복음4:21-25/2018.11.4.오전)
1. 이전에는 소련을 철(鐵)의 장막이라고 하였고, 중국은 죽(竹)의 장막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모든 것이 베일에 감싸여 그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생긴 말입니다.
그런데 중국의 등소평이 70년대 말부터 경제개방 정책을 실시하면서 도광양회(韜光養晦)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 뜻은 빛을 감추고 은밀하게 힘을 기른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 동안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다른 나라들과 분쟁이 될 만한 일이 생겨도 인내하면서 넘어갔던 것입니다.
등소평은 이런 자세를 100년 동안 유지하라고 유언을 했는데, 최근에는 자신들의 힘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여기저기서 각종 분쟁에 휘말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2천년의 역사를 보면, 시대 시대마다 세상은 이 생명의 빛을 덮어버리고 꺼버리고 감추려고 기독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해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제국은 우상숭배와 황제 숭배를 강요했고, 기독인들에게 불리한 제도나 박해를 통해서 신앙을 포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일제 식민지 때에도 로마시대와 똑같이 천황을 신으로 숭배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마침내 1938년에는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함으로 한국교회는 우상숭배에 무릎을 꿇은 부끄러운 역사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또한 북한의 공산당에 의한 종교말살 정책으로 인해서 또 다시 수많은 순교의 피를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그들의 탄압과 강요에 굴복하지 않고 순교로서 신앙의 자유와 주권을 지키면서 이 땅의 빛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며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과 은혜는 로마시대는 물론이고 중세시대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기 까지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목숨으로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이어옴으로, 오늘 우리가 자유로운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은 감출 수 없으며, 생명의 빛은 어디에 있든지 그 빛을 드러내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비추는 생명의 빛이요 진리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2. 마5장13절에 보면, 성도를 가리켜 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였고, 14절에 가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 이라고 하면서, 15절에 가서는 오늘 본문과 동일한 내용을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제목이 등불을 가져오는 사람이고 하였는데, 본문의 말씀을 원문에서 보면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등불 자체가 오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등불은 사람의 손에 들려서 움직이는 생명이 없는 어떤 도구가 아니라 생명과 인격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비유로 말씀하고 있는 이 등불은 무엇입니까?
요1장4-5절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고 하였는데, 이 생명의 빛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서 등불을 가리켜 정관사 "그" 가 붙어 있음으로 "그 등불" 이라는 뜻으로 이것은 요한복음처럼 세상을 비추는 생명의 빛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세상을 비추는 이 생명의 빛이 세상의 빛이 된 성도들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처음부터 세상의 빛으로 드러나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빛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 말미암아 성도는 세상의 빛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의 빛이 된 성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3. 어둠에 잠긴 이 세상을 비추는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 한 가운데로 오신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 세상 땅 끝까지 가져가서 그 빛을 비추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등불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높은 곳에 두어서 온 사방을 두루 밝히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등불을 됫박과 같은 것으로 덮어버리거나 혹은 평상 마루 같은 곳 아래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지난 해 4월 충청도에서 친구의 아내를 성폭행한 사람이 고소를 당해 재판을 받았는데, 무죄를 선고 받았습니다.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피해자 부부가 함께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의 억울함을 법이 해결해 줄줄 알았는데 전연 다른 결과가 나오자 자신들의 힘으로는 더 이상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그 부부는 우리는 죽어서도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유서를 남겼다고 합니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자살 행위 이면에는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깊이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법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정의를 실현하고 질서를 유지함으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가지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사법부의 법이 제 마음대로, 같은 사안이라도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저 사람에게는 전연 다른 판결을 내리면서 국민의 불신과 분노를 사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세상이 빛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4. 이사야 선지자는 빛을 잃은 이 시대를 미리 내다보면서 정확하게 단언하고 있습니다.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사59:4) 다고 하면서 뒤이어 말하기를, "그러므로 정의가 우리에게서 멀고 공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둠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 행"(사59:9) 한다고 탄식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가 포악과 패역과 배신과 거짓말을 잉태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이 시대는 빛이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암흑천지의 세상이 오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정의에 무지한자들과 포악한 자들만이 살기 좋은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국가에서 돈도 공짜로 주고 여기저기 마음껏 퍼주면서 선심이 너무 좋습니다.
일본도 선거 때가 되면 눈먼 돈들이 흘러 나와서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국가가 엄청난 빚을 지면서도 선심 복지정책을 남발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자신들의 어두움을 감추기 위한 방편으로 밖에 다른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오늘의 잘못된 모든 것들을 우리가 다 뒤집어 쓸 날이 오기 마련입니다.
거짓을 잘못된 것이라 말하지 못하고, 진리를 참되다고 말하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에 우리가 받은 사명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5.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생명의 빛으로 오셨지만, 어둠에 속한 사람들은 그를 잡아다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3일 만에 사망과 흑암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심으로 온 세상에 영원한 생명의 빛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믿고 따르는 기독교는 어둠을 비추는 빛의 종교요 사망의 권세에 사로잡힌 이 세상에 영생과 진리를 나누는 생명 그 자체인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만연한 이 어둠과 죄악을 무엇으로 몰아내어야 합니까?
이것은 무력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많은 재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그 어떤 선한 행위를 통해서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이 생명을 주고 소망을 주고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받은 사명은, 등불을 가져다가 등경 위에 두어서 어두운 방안을 골고루 비추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진리의 빛을 온 세상에 비추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 22절에 보면, 숨긴 것이 드러나지 않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면 우리의 행실을 통해서라도 빛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독일은 유대인들에게 가슴에 노란별을 붙이도록 했습니다.
이유는 강제노역의 대상으로 표시를 해 두고, 나중에는 살해하는데 용이하도록 구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국왕은 온 국민에게 호소하기를, 우리 기독교인들은 가슴에 노란별을 달아 주시오, 유대인들만 학살당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나치대원들은 누가 유대인이고 덴마크 사람인지 구분하기 어려웠고, 폴란드에서는 유대인이 300만 명이 학살당했지만, 덴마크는 대부분이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6. 마5장16절에 보면,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착한 행실 자체가 빛은 될 수 없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게 하는 이 선행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위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어두워진 이 세상에 생명의 빛을 비추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초개와 같이 버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까지 행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생명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비추지 아니하면 그 어떤 사람이라도 어둠 속에서 고통 하다가 멸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빛을 가진 자는 이 빛을 비추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등불이 빛을 제공하여 어둠을 밝혀주지만, 그것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더 이상 숨 쉬는 것을 멈추라고 누군가가 명령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우리의 생명을 빼앗기 위한 목적이 분명합니다.
그런 명령에 순종하여 숨 쉬기를 멈춘다면 그것은 자살행위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머지않아 이 세상은 우리를 향하여 분명히 이와 같은 요구를 해 올 것입니다.
우리가 소유한 이 생명의 빛, 그 빛을 비추는 것을 멈추라고.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예수 생명, 예수 구원의 진리에서 우리를 떼어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 생명을 포기하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7. 그렇다면 생명의 빛을 소유하고 있는 이 기독교 신앙은 순교하는 일은 있을 수 있어도, 어둔 세상을 향하여 생명의 등불을 비추는 이 행위는 감출 수도 숨길 수도 없는 일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가진 이 생명의 빛을 더 높은 곳으로 가져가서 온 세상을 덮고 있는 죄와 죽음과 고통과 불의를 몰아내는 일에 생명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생명의 빛을 비추는 일에 생명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에 생명을 건다면, 이 일로 인하여 수많은 생명들이 돌아오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사2:5) 고 하였고, 또한 미가 선지자는 말하기를, 나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미7:8) 고 하였고, 사도행전13장 47절에 보니,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고 주께서 친히 약속하셨습니다.

8. 하나님은 이방의 빛으로 우리를 이 일본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어두움의 땅에 진리와 생명의 등불을 가져 오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과 진리의 빛을 비추고 증거하는 귀한 사명을 주신 줄 믿습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말고, 세상과 짝 짓지 말고, 거짓에 침묵하는 비겁한 자가 되지 말고, 우리의 삶의 현장에 진리와 생명의 등불을 가져다 빛을 비춤으로, 잃어버린 많은 영혼들이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기적과 능력의 삶이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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