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4.16.부활의 증인(고린도전서15:1-15)

[성경본문] 고린도전서15:1-15개역개정

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12.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제공: 대한성서공회

부활의 증인(고린도전서15:1-15/2017.4.16.오전)
1.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의식주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이유는 이런 것들이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 못지않게 인간의 삶을 지탱해 주고 인간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중요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무엇입니까?
언어, 즉 우리의 입을 통해서 내가 가진 의사를 표시하는 수단으로서의 말입니다.
왜 사람의 말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언어는 삶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며, 용서와 치유를 줄 뿐만이 아니라 감사와 사랑의 표시를 할 수 있으며, 국가와 민족, 그리고 믿음의 공동체 같은 것들을 하나가 되도록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말을 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생각은 물론이고 그 행동을 파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정에 자폐증 환자가 있으면 대단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요한복음1장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했는데,(14) 이 말씀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거하고 있는데, 이 말씀이 세상 가운데 오셔서 사람의 생각을 바꾸고 삶을 바꾸고 미래를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 결과나 열매가 바로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입니다.
우리 주위에서도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기쁨을 잃어가고 생명의 빛을 잃게 되는 것을 볼 때, 이 말이 인간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어떤 사람의 말은 열심히 떠들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고 핵심이 무엇인지 파악조차 할 수 없을 때 듣는 사람은 답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들에게 말을 할 때에 공허한 말쟁이나 수다쟁이가 되지 아니하고, 듣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공감을 형성하고 만족을 주려면 어떤 말을 해야 합니까?

2. 오늘 본문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의 내용을 보면 사도바울이 여러 가지의 내용을 나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핵심은 하나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신 그 목적이 무엇이며, 그 목적을 위해서 행하신 일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분명한 답을 얻을 때, 우리는 고린도서를 기록한 사도바울의 의도를 알 수 있으며, 그가 증거하고 있는 이 일에 대하여 우리도 확신을 가지고 증인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 보면,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 다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분의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 부활의 복음을 어디서 누구를 통해 언제 어떻게 받았습니까?
우리가 받은 부활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들을 통해서 전승되어지고, 나중에 성문화되어진 이 성경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경우는 우리와 달랐습니다.
본문 8절에 보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남으로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활의 사건은 본문 5절 이하에 보면 열두 제자는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함께,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그 분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바울 혼자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 부활사건의 증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사도바울이 어쩌다 환상을 보았다거나 꾸며낸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적어도 그 당시의 유대인들 중에 특히 예루살렘에 거주하거나 머물렀던 사람들의 많은 수가 이 부활 사건의 실체를 알고 있었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특이한 것은 사도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존재라고 할 정도로 그 당시에 자신은 너무도 미미한 존재였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래의 바울의 모습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종교적인 지위와 세상의 학문, 그리고 로마시민권을 가진 남다른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교만이 하늘을 찌를 듯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로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이 부활사건의 목격자가 되었다는 것은 굉장한 체험이고 일생 최대의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당시에 교회를 핍박하면서 부활 사건을 증거하는 이 교회에 대하여 온갖 못된 짓을 자행하면서 그것을 명예롭게 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그는 다메섹에 있는 교회를 박살내기 위해 살기등등하게 나아가던 중에 자기가 그토록 핍박하고 미워하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이 결정적으로 박해자 사울이 변하여 사도 바울로 변화되고 말았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만이 사용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팩트(Fact)라는 것이 있습니다.  
입증할 만한 사실이나 지어낸 것이 아닌 사실을 말할 때 사용하는데, 이런 말이 새롭게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들의 많은 부분들이 실제가 아닌 어떤 집단이나 개인에 의해 악의적으로 가공되고 조작된 내용들이라는 현실에서 사실이나 진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언론들은 정의의 편에 서서 진실만 추구하던 전통적인 가치관의 펜을 꺾어 버리고, 더러운 이익이나 권력에 아부하여 컴퓨터로 악마의 편집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이 시대 언론의 현실입니다.
문제는 우리 기독교 신앙도 여기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4. 사도바울이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팩트(Fact)입니다.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출발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합니까?
사도바울처럼 우리의 신앙은 만남의 체험이 있어야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의 고백이 나올 수 있습니다.
누가 "카더라" 하는 그런 신앙이 아니라 체험, 곧 만남이라는 팩트가 있어야 합니다.
내게 있어서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바울이나 믿음의 선배들의 그들의 체험을 통해서 얻어지고 알게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가 만난 예수, 내가 경험한 부활하신 생명의 주인인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의 경우를 보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보니 제일 먼저 자신이 생각하지도 의도하지도 못했던 변화가 왔기 때문입니다.
3-4절에서 그가 고백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이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또한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 다는 것입니다.
그토록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부인하고, 그 이름조차도 듣기 싫어하던 바울이 이제는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그분에 대한 모든 내용이 사실로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한 번 믿어지기 시작하고 고백되어지니 놀라운 사건은 계속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박해자가 변하여 전도자가 되고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5. 그래서 그 이후로 그가 증거하는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성경대로 그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분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전연 새 사람이 되었다는 이 사실에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감격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본문 10절에 보니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 이요, 또한 내가 받은 주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헛되지 않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이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생명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그 사건이 자신의 인생에 얼마나 큰 충격이었고 사건이었고 변화에 대한 흔들릴 수 없고 의심받을 수도 없는 분명한 팩트(Fact)입니다.
우리가 전도자를 통하여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은 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에 변화가 왔다는 것은, 내 힘으로 만들어 내거나 연극하는 사람들처럼 흉내를 내거나, 또는 흥분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시적인 변화가 아니라, 사도바울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이러한 변화가 박해자 사울로 하여금 부활의 증인된 사도 바울로의 거듭남이 었습니다.
그 결과 본문 11절에서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6. 사람은 내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엿장수의 아들로 태어나면 어릴 때부터 달콤한 엿이나 빨면서 그것이 인생이 전부인양 생각하다가, 성장하여 세상에 나가보면서 여러 종류의 만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만남을 통해 내 인생에는 변화가 반복되고 지면서 새로운 삶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더 이상 엿장수의 아들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한 동량이 되고, 세계 인류의 평화에 공헌하는 인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만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누구와의 만남이고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죽은 지 삼일만에 다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그는 부활의 능력, 영원한 생명의 능력을 부여 받고 말았던 것입니다.
죽은 자도 살리고 잠자는 영혼도 깨우고, 병든 심령을 치료하며 이 죄 많고 고통이 많은 이 어두운 세상에서부터 생명의 불을 밝히고, 치료하고 새롭게 만들어 하나님의 나라가 먼저 이 땅에 임하도록 하는 그런 능력을 받은 것입니다.
한 번 돈 맛을 본 사람은 돈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한 번 권력의 맛을 본 사람은 그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하듯이, 마찬가지로 한 번 부활의 능력, 생명의 능력을 맛본 사람은 그 생명과 부활의 능력을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칠푼이 팔푼이 같은 자신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그 은혜를 헛되지 아니하도록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을 뿐 아니라, 그런 수고와 희생을 자신의 영광이나 능력으로 돌리지 아니하고, 다 하나님의 은혜로 돌렸던 것입니다.
겸손해 져서 인격이 변하고 더 많이 수고하면서도 그것을 결코 인생의 자랑이나 훈장으로 여기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7. 한 마디로 그는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자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특히 11절에서 "이같이 전파하매" 라고 한 것은, 부활의 증인으로서 그 어떤 타협이나 술수를 쓰지 않고 오직 순수한 부활의 복음만 증거하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나와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문제는 살인죄도 무서운데, 무죄한 자를 죽이고도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으며, 전도자를 통해 들어도 그것을 부인하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잠28:13에 보면 "자기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나와 내 죄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 죄를 자복하고 용서의 은혜를 구할 때, 주님은 우리를 사도바울처럼 축복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여기저기에 나타나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보여 주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첫째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부활의 능력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 부활의 사건을 목격하고 의심하거나 흔들리지 아니하고 도리어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8. 하루 동안에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말을 하면서 사는데, 그 하루 동안에 무슨 말들을 나누었는지 기억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상대방도 나의 말을 기억하고 그것을 가슴에 담아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마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은 대부분의 말을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과의 만남은 별로 의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그런 싱거운 만남일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만남의 종교입니다.
만이 우리에게 만남이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 분이 나를 위해서 무엇을 행하셨는지 알 수도 없으며, 우리의 신앙도 교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그 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 부어짐바 되었고, 그리고 나의 받은 부활의 능력으로 내가 먼저 변화되어 주님 오실 때 까지 이 부활 사건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만남은 결코 의문에 죽은 기록에 의한 만남이 아닙니다.
누가 카더라 하는 식의 그런 의심스러운 만남도 아닙니다.
어느 날 내 삶에 직접 찾아 오셔서 나를 변화시켜 주신 부활의 주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이 믿음 안에서 우리는 만났고 함께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통해 우리 주위에 이러한 많은 만남을 매일 매일 이어가는 그런 축복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부활의 증인이 받은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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