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5.17.예후가 보낸 편지(열왕기하10:1-11)
[성경본문] 열왕기하10:1-11개역개정
1.아합의 아들 칠십 명이 사마리아에 있는지라 예후가 편지들을 써서 사마리아에 보내서 이스르엘 귀족들 곧 장로들과 아합의 여러
2.너희 주의 아들들이 너희와 함께 있고 또 병거와 말과 견고한 성과 무기가 너희에게 있으니 이 편지가 너희에게 이르거든
3.너희 주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어질고 정직한 자를 택하여 그의 아버지의 왕좌에 두고 너희 주의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더라
4.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 왕이 그를 당하지 못하였거든 우리가 어찌 당하리요 하고
5.그 왕궁을 책임지는 자와 그 성읍을 책임지는 자와 장로들과 왕자를 교육하는 자들이 예후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라 당신이 말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행하고 어떤 사람이든지 왕으로 세우지 아니하리니 당신이 보기에 좋은 대로 행하라 한지라
6.예후가 다시 그들에게 편지를 부치니 일렀으되 만일 너희가 내 편이 되어 내 말을 너희가 들으려거든 너희 주의 아들된 사람들의 머리를 가지고 내일 이맘때에 이스르엘에 이르러 내게 나아오라 하였더라 왕자 칠십 명이 그 성읍의 귀족들, 곧 그들을 양육하는 자들과 함께 있는 중에
7.편지가 그들에게 이르매 그들이 왕자 칠십 명을 붙잡아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광주리에 담아 이스르엘 예후에게로 보내니라
8.사자가 와서 예후에게 전하여 이르되 그 무리가 왕자들의 머리를 가지고 왔나이다 이르되 두 무더기로 쌓아 내일 아침까지 문 어귀에 두라 하고
9.이튿날 아침에 그가 나가 서서 뭇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의롭도다 나는 내 주를 배반하여 죽였거니와 이 여러 사람을 죽인 자는 누구냐
10.그런즉 이제 너희는 알라 곧 여호와께서 아합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도다 하니라
11.예후가 아합의 집에 속한 이스르엘에 남아 있는 자를 다 죽이고 또 그의 귀족들과 신뢰 받는 자들과 제사장들을 죽이되 그에게 속한 자를 하나도 생존자를 남기지 아니하였더라제공: 대한성서공회
예후가 보낸 편지(열왕기하10:1-11/2015.5.17.오전)
1. 편지라고 하면 1970년대 초에 나온 이수영, 임창재 두 사람이 만든 어니언스 라는 그룹이 발표한 포크 송, 편지라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말없이 건네주고 달아난 차가운 손,
가슴 속 울려주는 눈물 젖은 편지,
하얀 종이 위에 곱게 써내려 간,
너의 진실 알아내곤 난 그만 울어버렸네.
그런데 우리가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통해서 주고받는 메일이나 SNS 문자를 가지고 편지를 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면 편지는 쓰는 사람과 받는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느낌 부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편지는 아날로그 시대의 대표적인 소통의 방식이라면, 메일이나 문자 메시지는 디지털 시대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인쇄된 책의 내용을 읽는 것과, 인터넷을 통해서 화면에서 읽는 책의 내용에서 받는 느낌처럼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니언스의 노랫말 처럼 우리 가슴속을 울려 줄 만한 그런 편지를 받아 본 적이 있는지, 또는 최근에 우리가 그런 편지를 누구에겐가 보내 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면 왠지 까마득한 느낌이 듭니다.
오늘 본문에 편지라는 단어가 3번 씩이나 등장해서 편지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정리하게 위해 사전을 찾아보니 편지에 대한 정의가 다음과 같았습니다.
첫째는, 글을 써서 보내는 목적이 뚜렷해야 할 것,
둘째는, 글을 쓴 대상이 분명해야 할 것,
셋째는, 일정한 격식이 있을 것,
넷째는, 상대방에 따라 그 내용과 표현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편지에 비교하면 현대의 SNS는 그야말로 단순히 문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2. 그러고 보면 편지에 대한 이런 정의는 예수 믿는 우리들이 세상 사람들 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 그것도 경건하고 열심히 있는 신자라면 하루에도 몇 번 씩이나 편지를 받아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아하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전체가, 특히 그 중에서도 신약 성경은 편지 형식으로 쓰인 내용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서 사도 바울이 쓴 편지는 이러한 형식에 딱 들어맞는 내용으로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매일 우리에게 사랑의 편지를 보내 주시고, 우리는 감사와 기쁜 마음으로 그 편지를 읽고 가슴에 품고 살아가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예후의 편지는 그 대상이나 내용이나, 편지에서 요구하는 용무가 예사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편지 한 장에 70여 명의 생명이 그것도 왕자들의 생명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편지를 받아본 사람들이 잘못 판단했다가는, 경우에 따라서는 70명이 아니라 수천, 수만의 사람들의 생명이 달려 있는 그런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예후의 편지 한 장에 모든 상황이 변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아침 까지만 해도 권력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를 받으며, 이스라엘에서 최고의 환경과 조건 속에서 가장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 살고 있던 70명의 왕자들이, 그 날 받은 한 통의 편지를 인하여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상황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한 장의 편지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인생 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3. 문제는 이 예후의 편지를 생각하면 아합에게 아들 손자 70명이 있어도 다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제 자식들이나 제 자손들이 아비가 세운 왕조를 위해서, 아비의 명예와 권력을 잘 지켜 줄 줄 알았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최고 석학들을 동원하여 자녀 교육을 시키면 큰 인물이 될 줄 알았지만 다 소용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권력에 충성을 다하고 있는 귀족들과 장로들에게 제 자식들의 교육과 장래와 생활을 믿고 맡겼지만 결과는 한결같이 그들에게 다 배신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에 믿을만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본문에 보면 왕궁의 책임자들이 있었고, 성읍의 책임자들도 있었고, 장로들과 왕자들을 교육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마는, 아합 집안을 위해서는 하나같이 연약하고 무력한 존재들뿐이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아합과 이세벨의 삶이 이스라엘의 참 주권자되신 하나님을 떠나 잘못되었고, 그 잘못된 삶에서 잘못된 씨를 뿌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후는 비록 악한자라도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쓰임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인간이 판단하는 선악 관계를 떠나 하나님의 예정을 따라 쓰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그런즉 이제 너희는 알라 곧 여호와께서 아합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도다" 고 했습니다.
예후를 이스라엘의 권력의 중심에 세우신 것도 하나님이시며, 아합 집안을 그의 손에 맡기신 것도 그 집안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예후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에 만연한 악을 제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4.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악이 득세하고 의인이 무고하게 고난과 죽임을 당하고, 사방에서 세상 종말의 현상이 일어나면서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어도, 인간의 생사화복과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은 먼저 선지자 엘리야에게 미리 아합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 누구도 선지자 엘리야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3대를 이어오는 오므리 왕조의 탄탄한 권력에 그 누가 대항할 수 있으며, 이스라엘 가운데 만연하고 있는 바알신 우상숭배를 이 아합 집안이 주관하고 있는데, 여기에 누가 거역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믿든지 아니 믿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선포하셨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을 심판의 도구로 선택하여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5. 아합을 중심으로 하는 이 오므리 왕조가 예후의 반란에 쉽게 무너진 결정적인 원인은 무엇입니까?
아합의 아들들은 죽은 우상에 불과한 바알 신앙은 배웠어도, 살아계신 하나님 중심의 신앙과 삶은 배워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녀교육의 실패 원인이 되었고, 이것이 가정 붕궤의 원인이 되었고, 이것이 결국 주의 사람들을 배신하게 만드는 사회생활의 실패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우상숭배의 출발은 인간 욕심에서 나오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을 이루고자 하는 교만에서 우상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북왕국 이스라엘의 19명의 왕들 중에 경제적인 부흥을 일으킨 왕은 있어도, 신앙과 삶에서 사람들에게 본이 될 만한 선하고 좋은 왕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 악한 왕들뿐이었습니다.
그나마 예후와 그 예후의 손에 죽은 요람 왕이 다른 왕에 비해서 그 평가가 조금 나았습니다.
예후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 왕들이 얼마나 못돼 먹은 인간들이며, 하나님이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로 보건데 인생은 그 출생이나 환경이나 조건이나 받은 교육도 중요하지만, 그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과 우리 인생이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신4:10)고 하시면서, 이와같이 하면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니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훨씬 더할"(신7:13-14)것이지만,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네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격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신28:58-59) 고 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잘되고 형통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6. 자식이 출생하면 부모를 닮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부모를 꼭 빼 닮은 자식을 낳아도 멀리 떨어뜨려 놓고 남의 손에 키우면, 전연 다른 사람으로 변해 버리고 맙니다.
우리도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창조하셨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하고, 제 육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살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부모 자식의 관계가 아니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거역하는데, 여기에 무슨 행복이 있으며 무슨 성공이 보장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평가하기를 "멸망의 자식"(요17:12)이라고 했습니다.
이 아합과 이세벨의 자손들이 바로 멸망의 자식들입니다.
특히 이세벨은 오만하고 사악하고, 악질이고 고집이 세며, 바알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파리 잡듯이 잡아 죽이면서 온 이스라엘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금지했으니, 이런 여자의 자식이 어찌 행복하며 성공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지금 한국에서 정치가들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백성들의 피와 같은 혈세를 눈먼 돈처럼 취급하고, 이리 저리 뇌물이나 받아먹고 있는데, 과연 이런 더러운 재물로 무슨 행복을 얻으며, 특히 자녀들을 그런 돈으로 먹이고 교육시키면 무슨 장래가 있으며, 무슨 영광이 있겠습니까?
이것도 그 결과는 아합의 자식들처럼 멸망의 자식이 될 뿐입니다.
7.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쓰임 받는 이 예후는 어떻습니까?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이세벨과 요람, 이웃 나라 왕인 아하시야와 아합의 70명의 아들들과 손자들을 잡아 죽이고, 바알을 숭배하는 모든 제사장들과 심지어 아합 집안과 절친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까지 다 잡아 죽이고, 바알 신전들을 모조리 파괴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대단히 훌륭한 개혁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31절에 보면,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하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는 이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죄짓게 만든 그 죄는 무엇입니까?
29절에 보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라고 자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후의 욕심이었습니다.
시편에 보면,“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여호와는 너를 지켜 모든 환란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시121:) 는 말씀대로, 그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가 애급의 금송아지 우상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신 줄 잘 알면서도 그의 욕심이 잘못된 길을 가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잘못된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바로 잡는 일에는 열심을 내었지만, 정작 제 자신을 고치고 새롭게 하는 것에는 관심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왕들 중에서 유일하게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었지만,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그래서 신분의 변화는 왔지만 가장 중요한 내적인 변화를 이루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내고 신비한 능력을 받아 귀한 일에 쓰임을 받아도, 말씀에 순종하고 자신을 새롭게 하는 일에 실패한다면, 도리어 이것은 불행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말하기를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 고 했습니다.
8. 그런 의미에서 예후의 편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6절의 내용을 보면, 너희가 살기를 원하면 내 뜻을 따르고 내 말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요 망해가는 이스라엘을 살리는 옳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예후의 편지는 무시무시한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를 받은 지도자들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왜? 제일 중요한 것은 선악을 떠나서 일단은 생명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지금 산다고 다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잘 살기 위해서 많은 수고와 희생을 아끼지 않는데, 그렇게 해서 며칠, 몇 년을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의 목적은 잠시 잠깐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영원한 심판을 받아 불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서 그의 자녀로 영원히 사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후처럼 편지로 협박을 하신다고 가정해 보아도, 우리는 말씀에 순종할 것 이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희생의 제물로 삼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편지인 이 사랑의 말씀에 순종해서 살지 못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사랑과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향한 배신이요 반역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9. 지금 누가 우리를 돌보며, 누가 우리를 복 된 길로 인도하고 있으며, 우리는 지금 누구의 은혜와 사랑에 힘입어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그 은혜를 인하여 살고 있는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세벨 처럼 살아서는 안 될 것이고, 자식을 그렇게 키워서도 안될 것입니다.
그런 인생은 죽어도 영원히 죽는 것이고, 망해도 영원히 망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살되 이 육신에 메여서 구차하게 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보여주신 그 본을 따라서 살아갈 때, 나와 우리의 자녀들에게 복 된 현재도 있고, 소망의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잘 사는 것이요 영원히 살되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서 사는 것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편지인 이 말씀을 들을 때 마다 우리는 지혜를 더하며, 이 말씀에 순종함이 우리에게 복을 더하는 것이요, 하나님 중심에 서는 것이야말로 가장 의롭고 성공하는 일인 줄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