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9.21.먹고 남는 것(열왕기하4:38-44)
[성경본문] 열왕기하4:38-44개역개정
38.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의 앞에 앉은지라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
39.한 사람이 채소를 캐러 들에 나가 들포도덩굴을 만나 그것에서 들호박을 따서 옷자락에 채워가지고 돌아와 썰어 국 끓이는 솥에 넣되 그들은 무엇인지 알지 못한지라
40.이에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였더니 무리가 국을 먹다가 그들이 외쳐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죽음의 독이 있나이다 하고 능히 먹지 못하는지라
41.엘리사가 이르되 그러면 가루를 가져오라 하여 솥에 던지고 이르되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하매 이에 솥 가운데 독이 없어지니라
42.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그가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43.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44.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제공: 대한성서공회
| 먹고 남는 것(열왕기하4:38-44/2014.9.21.오전) 1. 영국의 과학지인 뉴사이언티스트가 최근에 밝힌 내용 중에 조금은 충격적인 사실이 있었습니다.그것은 서구 선진국들의 지능을 조사한 결과, 1990년대 후반부터 인간의 IQ지수가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인간의 지능도 발달하는 줄 알았는데 실상은 정 반대의 결과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원인은 연구했더니 게임기, 컴퓨터, 스마트 폰 등의 디지털 기계가 지능을 떨어뜨리는 주범이라는 것입니다. 인터넷에 몰두하는 아이들의 지능이 계속 떨어지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서구뿐 아니라, 일본이나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미국의 경우는 1932년부터 46년 동안 국민들의 지능이 14포인트 상승했고, 한국도 경제성장과 맞물려 1970년대부터 20년 동안 비슷한 수순으로 상승했지만, 지금은 지능 수순이 정체되거나 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기계 문명이 가져오는 첨단 산업이, 사람을 도리어 바보로 만들고 인간의 지능을 퇴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옴으로 인류 문명에 한계점을 보게 되는 이런 현실 속에서, 과연 우리의 신앙세계, 영적인 세계에서는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웬만한 목회자들이 석사 아니면, 박사 학위를 한 두 개쯤 소유하고 있지만, 정작 목회자들의 질적 수준은 시간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으며, 성도들의 신앙 또한 마찬가지로 옛날 같지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2.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반드시 넘지 않으면 안되는 장벽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기심의 장벽입니다. 욕심의 장벽입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말이 있는데, 너도 나도 가난하고 없을 때에는 큰 욕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경제가 성장하고 세계경제 규모가 팽창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출세하고 성공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욕심이 생기고 이기심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기심과 욕심의 문제를 넘지 못하면 신앙이 자라지 않으며, 이것을 넘지 못하면 하나님의 참된 축복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약4:2) 고 하였고, 잠언에서는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잠11:24) 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기적인 욕심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온갖 좋은 은사와 능력을 다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갓난아기는 어머니 품속의 그 이상을 알지 못하고, 기어 다니는 어린아이는 서서 바라보는 눈높이와 바깥세상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감정이나 의사를 표시할 때에도 대부분 울거나 떼를 쓰는 것으로 표시합니다(요즘 우리 주위에는 불행하게도 이런 어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하는 능력, 언어의 장벽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성장은 가로막힌 장벽을 넘어갈 때 이루어지고, 소원성취도 앞을 가로 막고 있는 장벽을 넘어가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 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넘어야 할 장벽입니다. 이 장벽을 넘으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으며, 이 문제를 해결하면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이 보이는 줄 믿습니다. 3. 본문의 말씀을 보면 선지자 엘리사가 행하는 두 가지의 기적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이 사건을 보면서 예수님이 벳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 즉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에 남긴 사건과 너무 많이 닮았다는 것입니다. 이 기적은 주어진 상황까지 닮았습니다. 길갈에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는 상황과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던 무리들이 날이 저물었지만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있던 것이나 상황이 같습니다. 저도 어려서 삼일을 내리 굶어 본 적도 있고, 50여 년 전만 해도 먹여주고 재워만 줘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 당시는 경제라는 말이 호사스러울 정도로 사람들의 목구멍이 포도청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흉년이 들었으니 그 형편이 오죽했겠습니까? 집을 나간 탕자의 이야기를 보면, 재산을 탕진하고 난 뒤에 그 땅에 흉년까지 들었을 때 이 아들의 형편이 어떠했습니까?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눅15:16) 상황이었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는 평소에 먹지 않는 것이지만, 흉년이 들면 가난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어서 먹는 열매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쥐엄 열매도 부족할 정도로 기근이 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배가 고프면 사람들은 들이나 산으로, 혹은 강으로 가서 나무 열매나 풀이나 고기를 잡아 연명하려고 합니다. 길갈에 있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들에 나가서 가져온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에서는 이것을 들 포도덩굴에서 따낸 들호박이라고 했습니다. 4. 성경말씀을 풀어 해석해주는 주석에 보면, 이것은 콜로신드(Colocynth) 라는 식물로서 오렌지처럼 둥글고 노란색의 열매로, 그 맛이 매우 쓰기 때문에 사람이 먹으면 복통과 신경통을 일으키고 많이 섭취하면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라고 하는데, 그 사실을 본문 40절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 선지생도는 자신이 들에서 가져온 이 열매가 먹지 못할 것인 줄 알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그 탐스러운 열매를 보면서 요리만 잘하면 참고 먹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 열매가 가진 독성은 국물을 아무리 늘려도 치명적인 상황을 바꾸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엘리사에게 “솥 가운데 죽음의 독이 있다”(40) 고 소리치며, 이 문제의 해결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엘리사가 취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어디엔가 남아 있는 밀가루를 가져오게 하였고, 그 밀가루를 솥에 넣었더니 독이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2장에서 선지자 엘리사가 여리고의 나쁜 물을 소금을 넣어 고친 것과 같은 방법입니다. 나쁜 물과 소금의 상관관계나, 독이 든 솥에 밀가루를 풀어 그 독을 제거한 과학적인 근거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이런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5. 또 한 가지의 사건은 보리떡 스무 개와 채소 한 자루를 가지고 선지 생도 백 명의 장정들을 배불리 먹이고 많은 양이 남은 사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 만든 떡” 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율법에 기록된대로 첫 소산을 여호와께 바치는 제물이었습니다. 이렇게 여호와께 바쳐진 제물은 제사장과 레위인의 소유가 되었습니다(민18:13). 그것을 선지자 엘리사에게 가져왔고, 엘리사는 이 음식을 선지학교의 모든 생도들에게 나누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나오는 보리떡 한 개는 장정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음식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기근이라고 해도 백 명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입니다. 그래서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는 것입니다. 백 명의 장정들이 먹고도 남는 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말씀대로 그들이 먹고도 남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나오는 이 두 가지의 기적을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기 백성을 향한 자비의 은총입니다. 흉년을 만나 사람도 짐승도 죽어가는 그런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한 자비와 은혜를 멈추지 않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자비 앞에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이 그 가는 길을 가로 막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6. 본문을 보면 흉년에 먹을 것이 없어 많은 사람들이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 있으며, 42절에 보면 바알 살리사에서 온 사람이 자신의 만든 떡과 채소를 선지자에게 드렸다고 했습니다. 선지자 엘리사는 그것을 아낌없이 베풀어 굶주린 선지 생도들을 먹였습니다. 이 사건은 벳세다 광야에서 말씀을 증거하신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엘리사의 기적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나타낸 것이라면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사건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나타낸 기적입니다. 자비가 무엇입니까? 무엇을 가리켜 우리는 자비로운 행동이라고 말합니까?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을 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행동을 말합니다. 며칠 전에 뉴스를 보니 세월호 유족 대표들이 국회의사당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대리 운전자를 폭행하고, 일행인 국회의원 한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쌍방 폭행으로 몰아갔습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입니다. 세월호 침몰로 자식을 잃고 가족, 친척을 잃은 이 사람들은 온 국민의 동정과 지지를 받았지만, 정작 자기 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길 줄은 몰랐습니다. 온 국민들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지지와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정부와 맞서 싸울 수 있으며, 어떻게 권력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대한민국의 총체적인 수준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이것 밖에 안 된다는 그런 자학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은, 이번에 스코틀랜드가 300년 만에 영국에서의 독립을 위해 그 지역 사람들이 국민투표를 실시했는데,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자신들이 원하는 독립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너무도 아름답고 귀하게 보였습니다. 7. 사람은 늘 모자라는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모자란 것은 그 주인의 잘못이 아니라 제 생각에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지나치게 마셨기 때문입니다. 욕심 때문에 모자란 것입니다. 이기심 때문에 모자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모자람을 해결해 주시고, 남도록 채워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살면서 우리 인생이 늘 모자람을 느낀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모자라는 우리 인생의 빈 잔을 채워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그 모자라는 부분들을 채우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살을 찢고 피 흘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모자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움을 입되, 다른 인생들의 모자라는 부분을 채우고 담당하는 그런 삶인 줄 믿습니다. 마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모자란다고 소리치고 있으며, 불쌍한 자를 도리어 짓밟고 능멸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내 스스로 하나님의 축복을,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가진 재물과 명예와 행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추방당했던 것처럼 우리의 소유와 자랑이 언제 어디서 무너질지 알 수 없는 것들 뿐입니다. 8. 잠언 14:21절에,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하였고, 예수님도,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마18:33) 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생각과 행동이 우리로 하여금 재물의 넉넉함이나 빈궁함이나 관계없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넉넉하도록 우리의 삶이 먹고 남도록 만드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닮아갈 것이며, 또한 남고 넘치고 풍성한 삶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