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5.4.어머니와 아들(누가복음 7:11-17)
[성경본문] 누가복음7:11-17개역개정
11.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어머니와 아들(누가복음 7:11-17/2014.5.4.오전)
1. 장로교회를 포함한 개혁주의 교회는 그 성향이 전통적인 가치관 보다는 개혁과 변화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반하여, 가톨릭교회는 우리보다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혼을 금지하고 중절이나 혼전관계 등의 성적인 문제를 교회나 국가가 엄격하게 규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온 사상에 만연한 쾌락주의와 이민의 증가로 성경의 가르침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고 한탄하고 있는데, 이런 것은 신구교를 막론하고 어느 교파 어느 곳에서도 마찬가지의 현상입니다.
이미 20여 년 전의 이야기지만, 가톨릭의 전통이 강한 아일랜드의 경우에는 한 해 수천 명의 여성들이 자국에서는 엄격하게 금지된 임신중절 수술을 영국으로 건너가서 받고 온다는 것입니다.
이혼의 경우도 국가에서는 법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인간은 누구나 실패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결혼에 실패한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이고 보면 과거에는 이혼과 재혼이 부끄러운 것이었지만, 이제는 당당한 권리행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2012년 5월 9일에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ABC TV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나는 동성애를 지지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결혼이란 대단히 강력한 전통적이고 종교적인 신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 문제를 신중하게 다루고자 한다고 했는데, 그가 말한 신중하게 다룬다는 것은 자신의 주위에 있는 동성애자들이 국가나 교회나 사회적인 관습 때문에 결혼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는데 그들에게도 결혼할 권리를 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미입니다.
2. 이렇게 온 세상은 전통적인 가치관을 벗어버리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그 흐름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 젊은이들과 동성애자들입니다.
문제는 이런 흐름 속에서 세상은 점점 신바람이 나는 반면에, 가정과 교회는 급속하게 파괴되거나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지금은 여자들도 당당한 가장으로 사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가정이 흔들리거나 파괴되면 제일 먼저 피해를 보고 가장 많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여성과 어린아이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머물고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파괴되거나 위기를 만난 가정들이 쏟아내는 잘못된 산물들과 그 영향력을 고스란히 받음으로 이 사회가 휘청거리고 어두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일본에 와서 32년째 살고 있지만, 일본에 처음 왔을 때, 사람들이 들려 준 이야기가 일본 가정들이 심각하게 파괴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국가는 환경과 교육과 복지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고, 이 일을 위해 갈수록 세금을 올리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은 해결된 것이 거의 없고, 도리어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증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미국의 경우에는 결혼한 가정의 51%가 스웨덴은 48%가 한국의 경우는 47%가 이혼을 한다고 합니다.
일본의 경우는 세 가정에 한 가정쯤이 이혼을 한다고 하는데, 어찌 이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이런 것뿐이겠습니까?
젊은이들의 실업문제며, 직장인들의 스트레스와 우울증이며, 사람들이 도시로 몰리다 보니 시골의 마을들이 사라지고 고립된 노인들이 갈 병원이나 시장이 없고 버스나 철도가 사라지고 있는 것도 삶의 심각한 위협이 아닐 수 없습니다.
5월의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우리 가정들과 이 사회가 안고 있는 위기를 어떻게 해결하며 좀 더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을 주님의 말씀을 통해 만들어 보고자 합니다.
3. 본문의 나인성은 이스라엘의 헬몬산 아래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마을로 「나인」 이라는 성 이름이 목장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그런 곳으로,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종을 고쳐 주신 이후에 이 지역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이 나인성의 성문에서 만난 것은 장례의 행렬이었습니다.
12절에 보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장례 행렬을 따르고 있었고, 어미된 과부는 아들의 죽음을 통곡하면서 장지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소개된 여자를 성경은 과부라고 했으니, 이 여인의 가정은 이혼한 가정이 아니라 남편을 사별하고 여자 혼자서 아들 하나를 양육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두에 밝힌 대로 완벽하지는 않지만 지금은 여자 혼자서도 가장 노릇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그런 시대이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남편이 죽으면 여자는 한 마디로 말해서 사회적인 생명이 끊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남편이 남긴 재산이 없다면 당장 남은 가족의 생계가 막연한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랍 세계의 일부다처주의의 시작은, 전쟁으로 인해서 남편이 죽은 미망인들과 그 자녀들을 살리기 위한 방책으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이런 시대적인 상황에서 남편이 죽은 것도 억울한데, 이제는 자식이라고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까지 먼저 보내야 하는 이 과부의 형편이 얼마나 비통하고 힘들었겠습니까?
아들 하나 믿고 겨우겨우 의지하고 살던 이 여자의 슬픔은 그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그런 슬픔이요 고통이요 절망이 아니겠습니까?
4. 우리는 여기서 인생의 실제적인 문제를 만나고 있습니다.
남편도 잃고 마침내 독자까지 잃어버린 어머니의 모습에서 무엇을 느끼며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이 여인은 자신의 인생에, 그 가정에 예고도 없이 찾아온 죽음의 사신 앞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TV뉴스를 통해 전쟁과 테러로 수많은 생명들이 그야말로 파리 목숨처럼 잃어버리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세월호 침몰 사건을 통해 가족이나 자식을 잃은 유가족은 물론이고 온 국민이 상실의 아픔을 심각하게 맛볼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상실의 고통 속에서 대통령이나 수상을 욕하고 공격하면서, 우리 안에는 이 고통을 남의 탓으로만 돌리려는 생각으로 가득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통령이나 공무원들이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남을 탓하기 전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남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느냐,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우리 자신을 희생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느냐, 이것을 우리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정성을 다해서 장인의 정신을 가지고 물건을 만들고, 내 사랑하는 가족을 돌보고 사랑하는 심정으로 가르치고 지키고 관리를 했더라면, 내 가족과 자식을 잃고 망연해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내가 그렇게 욕심만 내지 않았더라면 대한민국과 한국 사람이 이렇게 세계적인 망신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5. 중요한 것은 상실의 아픔입니다.
이번 사건으로 이 나인성의 여인처럼 독자를 잃은 부모도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죽은 시신이라도 수습하여 장사를 치룰 수 있지만, 아직까지 시신도 못 찾은 부모들의 심정은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이런 상실의 고통과 슬픔 속에서 생각할 또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해서 많은 것을 얻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우리 인생은 늘 상실의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주신 에덴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아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심 때문에 자초한 죄의 세력은 우리 모든 인류에게 죽음과 고통과 영원한 저주를 가져 오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그 누구도 죄의 세력을 이기거나 막거나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죄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을 빼앗고 절망과 고통과 슬픔을 남기고 갑니다.
그래서 인생은 태어나면서 울고, 고통하며 살다가 더 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떠납니다.
나인성 과부도 행복한 인생을 꿈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생각대로 내 꿈대로 이룰 수 없는 것이 세상입니다.
죄는 지금도 우리에게 죽음은 물론이고, 질병과 실패와 근심과 배신과 이별과 절망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은 이 고통과 슬픔은 나인성 과부만의 슬픔이 아니요, 세월호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만의 고통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슬픔이요 고통이라는 사실입니다.
6. 그렇다면 죄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해결할 수 있습니까?
13절에 보니,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 셨습니다.
이 말씀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남의 사정을 몰라주는 허약한 박애주의자의 말처럼 들릴 수 있으며, 제 자식을 잃고 상실의 심연에 빠져 본 일이 없는 그런 사람의 상투적인 인사말로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생각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예수님은 아들을 잃고 그 관을 붙들고 울면서 따라오는 이 여인을 "보시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본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이 죄로 말미암아 고통과 영원한 저주에 사로잡힌 연약한 인간의 실상을 보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철학자들의 말처럼 인간을 초월해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을 고통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연약한 인간을 가장 가까이서 살피고 도움을 주시기 위해서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시94:9절에,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하였으니,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다 아시고 그래서 그 문제를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슬픔을 다 보고 계시며, 이 과부의 찢어지는 마음과 절망에 무너지는 고통을 아셨기 때문에 이 나인성까지 스스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7.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고 신의 힘을 빌려 도움을 얻기를 원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연약한 인간을 먼저 찾아오시고 그 형편을 주목하시고 도우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보시고 주목하실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불쌍히 여기" 셨다고 했습니다.
남편을 잃고 이제는 독자 아들까지 잃어버린 이 불쌍한 과부를 동정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며 울었지만, 그 누구도 이 여인의 고통과 슬픔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들도 한결같이 이 과부처럼 연약하고 죄의 세력에 사로잡힌 불쌍한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남을 위해서 울고 있지만, 머지않아 자신들이 스스로의 고통과 이별을 위해서 또 다시 울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까?
남편에게 소망을 걸었지만 그것이 부질없는 일이었고, 남은 아들에게 소망을 걸었지만 이 또한 소용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아무리 애지중지 키우고, 아무리 잘생기고 힘이 있고 온갖 교육과 좋은 환경을 제공해 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세상에서 실패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수치와 고통을 당하면 세월이 가면 잊을 수 있지만, 생명을 잃어버리면 더 이상 회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잃어버리고 관 속에 누워 있는 아들은 더 이상 제 아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죄가 들어온 세상에서 죄의 세력에 지배를 받고 사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8.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게 하신 말씀이 14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13절에서 울고 있는 여인을 향해 더 이상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관에 손을 대시고 장례 행렬을 멈추게 하신 후에, 그 관 속에 누워 있는 청년을 향해 말씀하시기를, "청년에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는 것입니다.
도무지 상식 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병들어 죽었을 때에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아이를 보시고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막5:39) 고 하셨고,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죽은 아이를 향해,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5:41) 고 하실 때 12살 먹은 이 소녀가 일어나서 걸었고, 아이에게 먹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은 무덤 속에 누워 있는 죽은 나사로를 향해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요11:43).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3-4) 는 말씀대로 창조의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 죄 많은 세상, 그래서 고통과 슬픔이 끝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들어야 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9. "청년에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는 이 말씀은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어머니의 슬픔과 고통을 단번에 해결하신 것은, 이 말씀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상식 밖의 말씀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풍랑이 이는 갈릴리 바다를 향해 잠잠하라고 명령하실 때, 바람과 물결이 잔잔해졌고, 귀신을 향해 나가라고 명령하니 사람 속에 숨어 있던 귀신이 소리를 지르며 쫓겨 나갔고, 그 어떤 질병이나 귀신도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고 말았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이같이 선포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향하여서 담대하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6) 고 하였고, 앉은뱅이는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춤을 추면서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인간은 연약하여 질병도 귀신도 죽음도 이길 수 없지만, 인간은 자신의 원하는 꿈과 계획도 이룰 수 없는 존재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연약한 인생에게 능력이요 축복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문제로 혼란과 고통 속에 빠진 21세기의 방황하는 인생들과 그 가정이 사는 길은 오직 말씀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이별로 고통 하는 어머니와 아들에게 부활의 능력이 되셨고,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기 전 보다도 더 큰 기쁨과 축복이 되셨습니다.
10. 오늘날 우리 가정에는 관 속에 드러누워 있는 청년처럼 그런 자녀를 둔 가정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고통이고 이것이 가정을 고통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녀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면, 예수님은 우리 자녀들을 향해 일어나라고 말씀하시고, 그 자녀들이 가는 길을 형통하게 하시며, 슬픔과 고통 속에 빠진 가정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위로하시고 더 큰 축복으로 인도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들의 가정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면 이 어머니와 아들처럼 우리 교회도 살고, 이 사회도 새로워지고, 나라와 민족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줄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