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30.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열왕기하 7:1-10)
[성경본문] 열왕기하7:1-10개역개정
1.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2.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3.성문 어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있더니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4.만일 우리가 성읍으로 가자고 말한다면 성읍에는 굶주림이 있으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만일 우리가 여기서 머무르면 역시 우리가 죽을 것이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 두면 살 것이요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 하고
5.아람 진으로 가려 하여 해 질 무렵에 일어나 아람 진영 끝에 이르러서 본즉 그 곳에 한 사람도 없으니
6.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 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7.해질 무렵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영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
8.그 나병환자들이 진영 끝에 이르자 한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니라
9.나병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하고
10.가서 성읍 문지기를 불러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아람 진에 이르러서 보니 거기에 한 사람도 없고 사람의 소리도 없고 오직 말과 나귀만 매여 있고 장막들이 그대로 있더이다 하는지라제공: 대한성서공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열왕기하 7:1-10/2014.11.30.오전)
1. 열왕기하의 내용은 처음부터 선지자 엘리야와 그의 제자 엘리사를 역사의 중요 등장인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행할 수 없는 능력과 기적들을 계속해서 보여주면서 영적으로 병든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6장 후반부에서 아람의 공격을 받은 사마리아 성에 기근이 극심해지면서 이스라엘 자체가 큰 위기에 빠졌고, 이러한 형편을 극적으로 반전시키는 장면이 7장에서 전개되고 있는데, 놀랍게도 그 중심에는 전연 예상치도 못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위기 가운데서 건져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전도할 때 저 사람이라면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과는 전연 엉뚱한 사람이 믿어 구원을 받으며 신실한 모습으로 봉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분명한 답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 이외에는 다른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바울도 이런 문제에 대하여 말하기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15:10) 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천국에 올라가도 이런 문제는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천국에 올라가면 분명히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을 수 있으며, 천국에는 오기가 정말 힘들 것 같았던 사람들이 그 곳에 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믿고 깨닫는다 하여도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우리가 다 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오늘 본문이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2. 본문의 사건 전개는 선지자 엘리사의 예언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고 했습니다.
지금 사마리아 성의 형편을 보면 아람 군대에게 오랫동안 포위되어 성중에 기근이 왔고,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짐승을 잡을 때 가장 먹기가 힘들고 고기도 별로 없는 나귀 머리 하나에 은으로 만든 세겔을 80개나 지불해야 겨우 살 수 있는데, 이 가격은 노동자의 1년분에 해당하는 품삯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영양가가 거의 없는 쓰레기 같은 비둘기 똥을 양식으로 거래할 정도였는데, 실제로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기근이 극심할 때에는 동물이나 사람들의 배설물까지 먹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제 자녀까지 삶아 먹는 지옥과 같은 참상에 빠진 사마리아 성의 형편을 보면, 엘리사의 이런 말은 듣고 이해하거나 믿을 사람이 과연 그 성중에 몇 사람이나 있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사람들 중에 왕이 가장 신임하는 장관 한 사람의 반응은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2) 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신다고 해도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 현장에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의 반응은 어떠했겠습니까?
3. 당연히 선지자의 말을 믿고 기다린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이란 평소에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곧 그 사람의 인격이고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잘 믿을 것이고 나중에 열심히 할 것이라는 말은 믿을 것이 못되고, 스스로를 속이는 불쌍한 사람이 될 뿐입니다.
왜냐면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은 하루아침에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통해 수많은 사건과 경험을 통해 만들어 지는 것이기 때문에, 갑자기 바뀔 수 없으며, 그래서 위기를 만나면 그 사람 속에 있는 본능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왕이 선지자를 우습게 알고 있는데 어찌 그 신하된 장관에게서 믿음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 결과 엘리사의 입에서 나온 대답이 무엇입니까?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구원과 기적을 너는 눈으로만 보고 그것을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불신앙입니다.
분명히 1절에서 엘리사가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 이라고 하였고, "여호와께서" 라고 말함으로 이 재앙으로부터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의지를 선포하고 보여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를 불신하였고, 그의 종인 선지자 엘리사를 불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을 죄였고, 엘리사의 예언대로 20절에 그는 하나님의 기적과 구원을 보면서도 백성들에게 밟혀 죽고 말았습니다.
이로 보건데 믿음이란 사람의 지식과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줄 믿습니다.
4. 사마리아의 참상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와 선지자들을 잡아 죽인 죄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시편기자가 고백한대로 "그의 노여움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라"(시30:5) 는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진노는 순식간에 물러가고 이스라엘에게 구원이 임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사마리아 성에 갇혀서 죽음을 기다리는 그들에게 신속하게 전해 줄자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령으로 이 4사람의 나병 환자를 사용하셨습니다.
레13:46절에 근거하여 나병환자들은 그 전염성으로 인하여 격리되어 살았습니다.
그들은 성 안에 거할 수 없는 사람들이요, 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그들은 가족과 이웃과 사회로부터 버림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임한 구원의 은총을 이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나병 환자 4 사람이 맛본 구원은 어떤 것입니까?
4절에 보니 여기 이대로 있으면 굶어 죽을 것이요, 어차피 성중에 들어갈 수도 없지만 그곳에 들어간다고 해도 양식을 구할 수도 없으니 굶어 죽기는 마찬가지요, 차라리 적군 아람의 진영에 가서 항복하여 죽임을 당하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본전이고 양식을 얻어먹으면 살 소망이 있으니 차라리 그리로 가자는 것입니다.
반신반의 하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찾아간 아람의 진영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문을 몰랐지만, 본문 6절에 보니 하나님은 이미 천군천사를 동원하여 아람군대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어 이스라엘에서 몰아내신 뒤였습니다.
5. 이렇게 해서 텅 비어버린 아람 진영은 이 나병환자 4사람의 몫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먹고 마시고 가져 갈 수 있는 대로 물자를 노략 하였고, 그들의 평생에 이처럼 횡재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먹고 배부른 후에, 많은 보화를 얻은 후에 그들의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9절에 보니 "서로 말하되 우리기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마리아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어린아이에 이르기 까지 나병환자들에게는 원수 같은 존재들입니다.
병들었다고 불쌍히 여기고 보살핌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버림받았습니다.
같은 이스라엘 사람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인데 나병 때문에 사회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 성중에서 굶어 죽던 망하던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의 마음에 갑자기 두려움이 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9절에 보니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 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람군대가 물러가고 그들이 진영에 남기고 간 양식이 풍부하여 사마리아성 의 굶주림을 해결하기에 충분한 물자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굶주림과 공포에 떨며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먹고 마시는 양식 문제의 해결입니다.
그런데 성 안에 갇힌 사람들은 이 소식을 알 길이 없지만, 자신들은 성 바깥에 있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름다운 소식, 복된 소식, 기쁨의 소식은 당연히 먼저 아는 자가 전하는 법입니다.
6. 이 나병 환자들이 횡재를 만나 좋아 죽을 지경인데, 그 가운데서 정작 그들이 느낀 감정이 무엇입니까?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두려움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양심의 가책에서 온 것입니까?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온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낀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 기쁜 소식을 알고도 입을 다물고 자신들만 누린 후에 당할 보복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더 이상 굶주린 이유도 없는데 이 사람들이 침묵함으로 이 밤에도 굶어 죽게 될 수많은 생명들에 대한 책임감에서 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 두려움이 그들의 생각을 바뀌게 만들었고, 이 두려움을 면하려고 용기를 내어 성중에 기쁜 소식을 알렸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 보면 진실을 왜곡하고 진리를 알면서도 입 다물고, 더 좋은 것일수록 자신만 알고 남들이 모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과 행동이 사회를 병들게 만들고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법에 저촉되지 않을지라도 분명한 범죄요 이웃에 대한 배신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 보다 더 무서운 범죄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7.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우리가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며 인간이 염려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이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해야만 할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나병환자들처럼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성을 멸망시키려던 아람군대를 물리친 것은 이스라엘의 군대나 왕이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물리치셨습니다.
그들에게 두려운 마음을 주심으로 사마리아 성의 포위망을 풀고 말도 타지 않고 맨몸으로 도망가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이스라엘이 가장 비천하게 여기던 나병환자들을 통해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또 다른 두려운 마음을 주심으로 사마리아 성 중에 하나님의 구원을 알리게 했습니다.
이런 감정은 사도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전9:16절에 보면,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 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득불이라는 단어는 바울과 복음의 상관관계를 잘 표현해 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원해서 복음 전도자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선택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포로된 신분으로, 마치 부역에 종사하는 사람처럼 강제로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아무리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공로가 많다고 할지라도 자랑할 것이나 보수를 바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물론 바울에게 감사와 기쁨과 자원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는 오직 그의 부르심에 복종하는 것뿐이었고, 그래서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큰 화가 미칠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8. 하나님은 이렇게 바울을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세우심 것처럼, 사마리아 성을 위기에서 구원하는 일에 4명의 나병환자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실 때에도 상황은 똑같았습니다.
제일 먼저 들에서 양을 치던 비천한 목자들에게 이 복음을 목격하도록 하셨고, 그들을 통해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구원을 제일 먼저 알리도록 하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재현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순간에도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 결단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며 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셔야만 했으며, 그 분과 우리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으며, 십자가는 무엇이며 그 분이 나를 위해 행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이 사미라아 성 같은 이 오사카 사람들에게 증거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당장 우리 집에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깨닫지 못하고, 그 분의 사랑과 은혜에 대하여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성문을 꼭꼭 닫아걸고 그 안에서 그 영혼과 육신이 굶어죽어 가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염려하고 이 나병 환자들이 염려하는 두렵고도 무서운 이 화가 누구에게 미치겠습니까?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도 고백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의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20:9)
선지자의 말을 듣지도 아니하고 무시하고 날마다 조롱거리가 되니 더 이상 말하지 아니하리라 결심했을 때, 하나님이 그 마음에 답답함의 고통을 주셨고, 예레미야는 죽을 때 까지 여호와의 말씀을 외쳤던 것입니다.
9. 본문의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 보면 모든 구원은 선지자 엘리사의 예언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다 이루어 놓으셨고, 이 나병환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 완성된 하나님의 구원을 사마리아 성에 가서 알려주는 것뿐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 용서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먼저 구원 받은 우리의 할 일입니다.
나병 환자와 같이 몹쓸 병과 같은 죄 짐을 지고서 세상에서 버림당하고 무시당하고 온갖 부끄러움과 연약함 속에 있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우리의 욕심이 우리의 잘못된 생각이 이 귀한 은혜를 거부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 너무도 간단한 이 일을 외면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복음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고전1:18)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전하는 자에게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능력과 영원한 기쁨입니다.
이 기쁜 소식을 전할 때 성도는 세상을 이기는 능력으로 충만한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힘써 전해야 하고, 전할수록 세상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되며 우리는 더 큰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