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5.욕심이 잉태한즉(열왕기하5:20-27)

[성경본문] 열왕기하5:20-27개역개정

20.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 하고

21.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맞이하여 이르되 평안이냐 하니

22.그가 이르되 평안하나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제자 중에 두 청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로 왔으니 청하건대 당신은 그들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23.나아만이 이르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그를 강권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우매 그들이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

24.언덕에 이르러서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받아 집에 감추고 그들을 보내 가게 한 후

25.들어가 그의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하니 대답하되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26.엘리사가 이르되 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

27.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하니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제공: 대한성서공회

욕심이 잉태한즉(열왕기하5:20-27/2014.10.5.오전)
1.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동산에서 아무런 문제 하나 없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단이 간교한 뱀을 통해 그들을 유혹했고, 그들의 마음속에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말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된”(창3:5) 다는 말에 속은 것입니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었습니다.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고 죄가 주는 저주와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고, 사형수처럼 죽음이 선고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처럼 인생은 아담과 하와처럼 아무리 좋은 환경과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도 제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 불행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다 잘해야 하겠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온갖 죄의 유혹과 거짓된 속임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요즘 한국에서 돌고 있는 말 중에 한 가지는 “내가 누군지 알아?” 라는 말입니다.
인터넷에서도, “내가 누” 만 쳐도 “내가 누군지 알아?” 가 떠오릅니다.
이 말은 소위 사회적으로 지위나 소유나 남다른 힘과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 보다 약한 사람들 앞에서 잘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 같은 나라에서도 문제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옛날에는 통했는지 몰라도 이제는 패망의 지름길이라는 것입니다.
잠언에도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16:18) 라고 했으니, 제 마음을 바로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잘 말하고 있습니다.

2. 오늘 본문에는 유혹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바로 다스리지 못하고, 죄가 원하는 대로 끌려가다가 패가망신 해버린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닌 선지자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 입니다.
엘리사를 섬기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축복의 역사를 목격하며, 주의 종의 삶과 사역을 통해서 감화를 받아 새사람이 되어야 할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에 가롯 유다가 그런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고 하면서 계속해서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1-12) 고 하였으니, 오늘 우리는 욕심, 탐심이 가져온 죄, 다시 말해서 자신의 마음을 유혹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한 자의 결말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서 깨닫고 자신을 말씀에 비추어 새롭게 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3. 아람 나라에서 찾아온 문둥병자 나아만 장군이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받고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참 신임을 고백하고 그만 섬기기로 작정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종 게하시가 볼 때 참으로 기가 막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병으로 인해서 절망과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치료해 주고는, 깨끗함을 입은 사람이 강권하여 주는 귀한 선물들을 하나도 받지 아니하고 돌려보내는 엘리사의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아마 이 때의 게하시의 마음이 예수님 제자들의 마음과 같았을 것입니다.
마26:6절 이하에 예수님이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앉아 계실 때, 한 여인이 찾아와서 예수님의 몸에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다 부어버렸을 때, 이 광경을 시종 지켜 보고 있던 제자들이 분개했다고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9절에 보면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하시의 생각에는 나아만 장군의 가지고 온 은금과 비싼 의복을 받으면, 이것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선지생도들은 물론이고 흉년으로 인해서 고통당하는 많은 사람들을 굶주림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이 본문 22절에서 게하시가 나아만에게 거짓말을 할 때에 선지자의 제자 청년들을 핑계로 삼은 것을 보면 그럴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을 돌아보고 염려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내 것을 희생하고 남을 돕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런데 선지자 엘리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게하시는 이것이 불만이었습니다.

4. 나아만이 돌아가고 나서 게하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그런 막대한 재물은 두 번 다시 볼 수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는 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급히 나아만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나아만을 속이고 두 벌의 옷과 은 두 달란트를 받아 제 집에 숨겼습니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없이 게하시가 생각한 대로 모든 일이 잘 진행되었습니다.
문제는 집 안에 앉아 있는 선지자가 게하시의 일거수일투족을 꿰뚫어 보듯이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이 본문 26절에 나와 있습니다.
게하시의 어리석음은 하나님의 종 선지자를 자기 수준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범죄의 증거가 되는 은과 의복은 집안 깊숙한 곳에 감추어 두고, 거짓말하고 시침을 뚝 떼면 모를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탐욕과 속임과 무례함, 그리고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는 그 마음이, 그 태도가 문제였고 재앙이었습니다.
불행한 것은 탐욕에 눈이 어두워진 게하시였지만 그에게도 회개할 기회는 있었다는 사실이고, 게하시는 그것이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인 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25절에 보니, “네가 어디서 오느냐” 고 물었을 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빌었더라면 탐욕으로 인한 재앙은 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재물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은 그것을 회개의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변명하는 거짓말의 기회로 삼을 뿐입니다.
여기서 게하시는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가장 소중한 관계를 깨트리고 말았습니다.

5. 선지자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사명에 관한 말이었습니다.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26) 는 것입니다.
너나없이 어렵고 힘든 이 시대에 여호와께로 받은 말씀과 능력으로 백성을 살리고 위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도 모자랄 것인데, 어찌 물질에 눈이 멀어 탐욕의 노예가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27) 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선지자 엘리사의 앞에서 물러날 때 죄의 값을 치루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는 한 세대로 그 보응이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게하시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이 단단히 화가 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아만 장군에게 임한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 그 은혜를 돈으로 바꾸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라고 왜 돈이 필요하지 않겠으며, 왜 의복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 엘리사가 나아만으로 부터 일체의 선물이나 대가를 받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선지자가 제 능력으로 이 병을 고쳤으면 혹시 대가를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아만 장군이 나병에서 놓임을 받아 깨끗하게 된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고,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었기 때문에 대가를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6. 옛날이자 지금이나 십자가를 세워놓고 그 아래에서 점쟁이처럼 예언해 주고 돈 받고, 안수해 주고 대가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빙자하면서 완전히 무당 짓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문둥병이 걸린 사람들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모든 더러움을 씻었지만, 게하시는 나아만을 속이고 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선지자를 속이고 하나님을 모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게하시의 탐심이 얼마나 계획적이고 치열한지 본문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2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내가 그에게서 은금을 받지 아니하고는 결코 그를 돌려보내지 않으리라는 의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탐욕의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욕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저도 게하시 같은 유혹을 여러 번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탐욕의 유혹이 올 때 그것을 이기는 비결은 그냥 눈 한 번 감아버리고 없던 일로 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축복과 은혜는 내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당장 재물을 손에 넣는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내가 행복해 질지 불행해 질지도 모르며,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죄인이 된다면 이것보다 더 낭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죄의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이나 유혹을 이기는 사람이나 눈 한 번 감는 것은 똑같지만, 그 결과는 정 반대의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7. 욕심의 결과, 탐욕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결론부터 말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은 얻지도 못하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것만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물질을 소유하여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했지만 결과는 나아만의 나병을 얻고 말았습니다.
인생의 풍성함을 누리려고 했지만 죄가 주는 나병으로 모든 관계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원하는 것을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저주 가운데 갇히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나아만의 깨끗함과 게하시에게로 옮겨간 나병, 그리고 그의 탐욕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자의 삶입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함을 입은 우리, 왜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쏟아 우리를 살리셨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그의 거룩함을 닮아 깨끗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얻으며 권세와 명예를 얻으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축복은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함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된 자들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마5:13-14) 이라 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8. 오늘 본문은 여러 부분에서 많은 대조를 이루고 있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종들의 태도에서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아만의 종들은 주인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의 병을 낫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지만, 선지자 엘리사의 종은 욕심에 눈이 어두워 제 주인을 속이는 파렴치한 사람이었습니다.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 앞에서 받지 아니하리라”(16) 고 했지만, 게하시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20) 고 했습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을 보면서 무슨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들의 인격입니까? 그들의 지위나 능력입니까?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은혜 바깥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과는 인생의 목적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선지자 엘리사의 맹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맹세요, 게하시의 맹세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은혜를 더럽히는 맹세였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은 교회를 생각하고 성도들을 대하거나 목회자를 대하는 태도나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결국에는 우리의 태도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9. 우리가 의문점이 드는 것 중에 하나가 게하시가 하필이면 많은 저주 가운데서 왜 나병에 걸렸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게하시는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스스로 그렇게 원했기 때문입니다.
20절 하반절에 보면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게하시의 탐욕은 나아만이 버린 나병까지 물려받았고, 온 가족이, 자자손손이 나병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물질을 얻으려다가 욕심에 빠지니 건강도 잃고 은혜도 잃어버리고 인간의 존엄성까지 다 잃고 말았습니다.
욕심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말로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그 은혜를 탐욕 때문에 짓밟아 버리는 사람의 결론입니다.
요즘 사람들을 보면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고 교인들까지도 정말 욕심이 많으며, 그 욕심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의 결말을 우리가 잘 알면서도 그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게하시의 결말을 보면서도 우리는 그것과는 상황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욕심은 우리의 거룩함을 훼손하며 탐욕은 영의 눈을 어둡게 만들고 결국에는 육신은 물론이고 영적인 문둥병자로 세상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야고보은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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