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7.21.예수님의 자리(마가복음9:30-37)
[성경본문] 마가복음9:30-37개역개정
30.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31.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32.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33.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제공: 대한성서공회
| 예수님의 자리(마가복음9:30-37/2019.7.21.오전) 1.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눈만 뜨면 무엇인가를 선택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세상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늘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고, 가장 뛰어난 것을 선호하기 마련입니다. 이유는 그 날의 선택이 하루를 결정하고 한 번의 선택이 우리 인생의 평생을 좌우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매 순간 선택해야 할 때 마다 우리는 최선의 것을 최고의 것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느냐 하면,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잘못된 선택으로 평생 후회하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한 지금 최선의 것을 선택하였다고 할지라도, 그 다음 단계에 가서도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한다는 보장은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인간은 스스로가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우리의 현실이나 세상이 요구하는 그런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이유는 우리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 지나치도록 너무 많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급속도록 빨리 변화되어가고 있으며, 세상에는 공유할 수 있는 지식이나 기회는 너무 많기 때문에 이것이 도리어 우리의 선택을 흐리게 하거나 주저하거나 고민하게 만들어, 잘못된 판단으로 인하여 잘못된 선택을 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도 지금 이 자리에 함께 모였지만, 여기에 모이기까지는 교회 가서 예배를 드릴 것인가 아니면 다른 더 중요한 일을 먼저 할 것인가 많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2.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 기회가 많다고 그것이 성공의 확률이 높이는 것도 아니며, 선택의 여지가 많을수록 삶에 대한 자유나 행복을 더 많이 향유 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명백하게 지지해 주고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막8:34절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 이라고 이 말씀입니다. 자기 부인은 곧 내 생존을 위한 모든 선택의 기회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선택이라는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단 한 가지의 이유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던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한 최선의 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세상 한 가운데서 인생에게 주어지는 셀 수도 없는 수 많은 선택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라지 않고, 결과야 어찌 되었던 지 오늘은 이렇게 선택하고 내일은 저렇게 선택하면서 마치 자신이 스스로 신이 된 것처럼 제 인생을 위해서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분은 이럴까 저럴까, 이쪽을 선택할까 저쪽을 선택할까 하면서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이미 세상에 오시기 전부터 이미 가장 최선의 선택을 결정하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본문의 31절의 말씀입니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 는 것이었습니다. 3. 주변을 보면 일관성 없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같은 일을 해도 좌충우돌 하면서 나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스스로 내린 결정을 어쩔 수 없이 번복하는 실수를 하기도 하며,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도 이상할 정도로 잘못된 것에 집착해서 그것에 끌려 다니면서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시는 예수님의 경우는 늘 한결같으신 분이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성경의 핵심입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의 십자가 사건을 예고하시는 것은 마가복음에서 3번 나오는데, 8:31, 9:31, 10:33절 등입니다. 이것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예수님의 생애 중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그가 이루시고자 하시는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한 가지 의아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드러나시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등의 대부분의 선거는 후보자를 세워 세상에 그의 인물 됨을 공개하면서 자격이 있는 자를 검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거에서 이기려면, 아니 선거라는 과정을 통해 실력 이상의 능력을 인정받으려면 자신을 숨길 것이 아니라 공개하고 자신의 좋은 점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반대로 행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4. 예수님이 가시고자 하시는 길은 십자가의 길,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그 뜻을 이루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드러나는 문제의 핵심은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지려고 하는데, 그의 제자들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자기들의 원하는 길로 가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상황이 33절 이하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가고 있는 이 믿음의 길의 진정한 승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섬기는 종이 되기를 원하셨지만, 제자들은 반대로 다른 사람들을 이용해서 자신들이 높아지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당연히 예수님 처럼 섬김의 종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제자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이 제자들을 그렇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이 내 아래에 있다고 여겨지는 순간 사람들은 무참하게 그를 밟아버립니다. 때로는 이용하고 그렇게 이용하면서도 상대를 멸시하고, 충성이나 정직이나 성실에 대한 정당한 대우나 대가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기 위해서는 남을 짓밟고 서라도 올라가야 하며, 온갖 부정과 거짓말을 해서 라도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 모양이고 보면 제자들만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 끼리도 서로 더 높이 올라가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인정받기 위해서 길을 가면서도 말다툼을 하고 싸웠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 35절 이하의 말씀이 바로 그 대답입니다. 5. 진정으로 사람들 가운데 첫째가 되기를 원한다면 너희는 먼저 남을 섬기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품격이나 사람들을 따르게 만드는 리더십은 어디서 시작한다고 생각합니까? 예수님 처럼 먼저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든지 성공하려면 먼저 사람을 알아야 하는데, 사람을 알지 못하고 사회의 정점에 서게 되면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본문 35절의 "사람의 끝"이라는 이 자리는 어떤 자리,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지금 예수님이 가 계시는 그 자리를 말하는 것이고, 쉽게 표현하면 남들을 섬기는 자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성인이 되어서 무엇이 되고 싶은 지에 대한 선생님의 질문에 많은 아이들은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대통령의 자리는 한 사람만 앉을 수 있습니다. 50년 동안 기다린다고 해도 기회는 10번 밖에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 밖에 없는 그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싸우다 보니 5천 만 인구가 마치 대통령 병에 걸린 것처럼 되었고 그 후유증은 오랜 세월 고통으로 남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사회가 지위나 자리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6. 그러나 우리가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위로 올라가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꼴찌로 내려가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1등이 되는 인생의 지름길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뀐다고 하여도 이런 궤변은 있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말석에 가서 앉아 모든 사람들 앞에 자신이 꼴찌가 된 것을 선전하는 것이 일등 가는 인생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올림픽에 국가 대표로 나가서 꼴찌를 하면 국위가 선양 되고 꼴찌 메달이라도 걸어준다는 말입니까? 만일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나간 선수가 있다면 국제적인 망신만 당할 뿐이고 도리어 올림픽의 가치와 정신을 손상시킬 뿐이라고 비난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아무리 돈독한 신앙심을 가진 기독인이라도 이런 스포츠 경기에 나가면 죽기 살기로 싸워서 우승을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본문에서 말석에 가 앉는 꼴찌를 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세상의 논리로 보면 섬기는 자와 섬김을 받는 자는 사회적으로 보면 신분이니 격이 서로 다른 인생입니다. 그래서 예외 없이 누구나 섬김을 받아야 사람 대접을 받으며, 그 섬김이 절대적인 것일수록 특권을 누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나 인지도가 높은 지위를 마치 인생의 성공이나 승리를 얻은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그의 제자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들은 길에서도 이 문제를 가지고 서루 다투었던 것입니다. 7. 그러나 본문 37절을 보면 제자들을 향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어린아이는 사회적인 지위로 보면 가장 하찮고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도움도 안 되고 시시하게 보이는 존재일 것입니다. 도움은커녕 가까이하면 할수록 내 인생의 짐이 될 만한 그런 어린아이를 예수님은 데려다가 가운데 세우시고 하시는 말씀이,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별 볼일 없어 보이는 그런 존재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섬기고 높여주면 그것이 곧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힘 있는 자, 많은 것을 소유한 자, 인기 있는 사람에게 붙으려고 합니다. 낮은 자리에서 그들을 섬겨서라도 그들의 소유하고 있는 권력이나 소유의 혜택을 입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요13:12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은 반대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벧전5:6절에 보니,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는 말씀대로, 또한 그 앞 절에 기록된 것처럼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니느라" 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8.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겸손한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은 겸손한 마음, 겸손한 삶 속에서 진정한 꽃이 피고 열매 맺는 영광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시고자 하시는 고난의 길인 이 십자가 구원의 완성은 이런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왜 야곱의 아들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에서 강제로 떨어져 나가 애굽의 노예로 팔려야만 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하실 놀라운 일이 계셨지만, 그에게는 겸손이라는 모습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늘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형들을 멸시하고 특권 의식 속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애굽에 내려가서 노예의 신분으로 이방인을 주인으로 섬기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은 사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곳에서 잉태되는 지상의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은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인 사울 이라는 청년을 예정하셨지만, 그에게는 겸손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모습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도 따라오기 어려운 그런 위대한 일을 행하면서도, 계속해서 박해라는 고난을 통해 예수님이 계시는 가장 낮은 자리로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얻기 원하시는 것은 위대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 처럼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사울에서 바울로 바뀐 것을 보면 그가 겸손하지 못함으로 인해 얻어야 했던 고난과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고난을 통해서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아시아 각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9. 우리는 입버릇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해 달라고 말하지만,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입술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 겸손한 삶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겸손한 사람만이 복음을 위해 십자가를 질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 보다 가장 낮은 곳에 내려 갈 때에,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섬겨야 할 사람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교만하고 연약했던 우리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곳이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욥기에서도 "만일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 형통한 날을 보내며 즐거운 해를 지낼 것"(욥36:11) 하였으니, 우리도 예수님 처럼 가장 낮은 곳에서 복음의 십자가를 지고,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남들을 섬길 때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한 영광과 상급이 주어지는 줄 믿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