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6.23.영광스러운 변화(마가복음9:2-8)

[성경본문] 마가복음9:2-8개역개정

2.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3.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4.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5.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7.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제공: 대한성서공회

영광스러운 변화(마가복음9:2-8/2019.6.23.오전)

1.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지금까지 인간으로서 위대한 스승으로 생각했지만,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그 생각이 변화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베드로의 고백이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마16:16) 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스승으로서, 혹은 위대한 인간으로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의 고백 그대로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류를 모든 죄에서 구원하실 유일한 그리스도, 즉 메시야로 보기 때문에, 인간으로만 보이는 예수에게는 구원도 영생도 보이지 않지만,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영광스러운 미래가 보장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많은 기적과 능력을 행하셨고,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수도 없는 귀한 지혜와 교훈을 주셨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있지만, 우리는 그런 역사적인 사건만 믿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안에서 살아 계시면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 가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처한 환경과 조건은 각각 달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이상, 우리 안에는 지금도 그 분이 살아 역사 하시며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한 사명을 완성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도우시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2.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이 3명의 제자들을 따로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 가셨다고 하였고, 그곳에서 제자들이 볼 때 예수님은 광채가 나도록 희게 변형된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그 산을 해발 560미터의 다볼 산이나 2,770미터의 헐몬 산으로 보고 있지만, 성경은 정확한 산 이름을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보통 변화 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변형」이 되셨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단순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3일 만에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셨을 때처럼 본질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변형되신 예수님의 모습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본문 3절의 의미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는 도무지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찬란한 광채로 빛을 발하고 계시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야기로만 듣던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그 광채 가운데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목격함으로 제자들로서는 경이로운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의 반응과 그가 예수님에게 요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만들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그 분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수준의 존재가 아니라 능력과 영광과 신성으로 충만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3. 뛰어나게 아름다운 산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 대수롭지 않은 존재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내 키 만큼의 높이 쯤으로 보이던 산은 점점 높아져 가고, 시커멓게 보이던 산도 가까이 갈수록 생명력이 넘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이고, 마침내 산 속에 들어가 내 몸을 맡기면 넘치는 생명의 조화를 맛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멀리서 보고 생각할 때에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관계는 상대방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생각과 행동이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즉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을 셋 지어서 우리가 다 같이 이곳에 함께 있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머리로만 가까이 가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처럼 위선적 종교 지도자가 될 수 있지만, 몸과 마음으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 얼마나 복 되고 아름답고 귀한 일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도 고백하기를,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시73:28) 고 하였고, 시65:4절에서는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 다고 하면서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고 하였습니다.
내가 지금 누구를 가까이 하며 무엇을 가까이 해야 복이 될 것인지 시편 기자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4. 마음이 외로운 자는 먼저 주님을 가까이 해야 할 때에 위로와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
병든 자나 육신이 연약한 자도 주님을 가까이 할 때 새 힘과 능력이 되어 줄 것입니다.
실패한 인생이나 삶의 현실이 감당이 안 되는 자도 예수님을 가까이 하면 소망과 응답의 삶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변화 산 아래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예 이곳에서 주님과 함께 눌러 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소망을 가지고, 세상에 만족하는 사람은 교회로 나올 수 없습니다. 나온다 하여도 종교 생활 이상을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가까이 함으로 큰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야고보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4:8) 고 하였으니,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만큼 하나님도 우리를 가까이 하심을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 할 때 항상 큰 은혜를 입고 늘 확신과 평안 속에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받은 은혜를 쏟아버리고, 알게 모르게 세상이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에 생각이 바뀌고 마음이 변하다 보니, 기쁨이 변하여 근심이 되고, 평안이 변하여 두려움이 되고, 확신이 의심으로 변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은혜가 넘칠 때 열심을 내고, 기쁨이 넘칠 때 더 큰 은사와 능력을 사모해야 흔들림이 없이 믿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5. 그러므로 교회 나와서 주님의 은혜로 위로를 받고 새로워지고 새 힘을 얻은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혜 받는 순간은 잠깐이고 우리는 여전히 세상과 싸우며 책임져야 할 삶의 무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을 때, 받은 은혜만큼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날 새롭게 하신 주님의 능력을 세상 가운데 나타낼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 7절 이하에도 보면, 그런 사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갑자기 변화 산을 덮은 구름 속에서 들리는 음성은 누구의 음성입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였으니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구름은 구약 시대로부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아들의 말을 들으라는 것은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비록 내 생각과 계획과는 달라도 우리는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하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 하는 이것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에게 순종 하지 않고는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6. 그러나 제자들을 놀래게 만들었던 변화 산의 사건은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의 경이로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남다른 특별한 권능과 은사들, 그리고 남다른 영적 경험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실 때 연약한 육신을 입고 오셨고, 33년의 생애를 통해서 3년 간의 공생애 기간을 제외하고는 지나치도록 평범하게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사셨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능력과 은사가 있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주신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직 한 가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는 이것 뿐입니다.
삶의 고통 속에서 말씀을 묵상 하며 은혜로운 글을 많이 남긴 헨리 나우웬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살아 있는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만드신 육신이시며 우리의 육신 가운데서 그 자신을 계속하여 나타내시며, 그러므로 진정한 구원은 (우리가)그리스도가 되는 것」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다면 이것은 우리의 영원한 성공이고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님 처럼 우리의 영혼과 모든 것을 아버지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둘도 없는 축복이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7. 사실 변화 산 위에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대화를 나누신 그 장면은 시각적으로는 경이로운 사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리 대단한 사건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첫째는, 모세는 율법을,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상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예수님을 가리켜 기록하기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 하셨고, 예수님이 오셔서 하시는 일이 곧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임을 거듭 밝히고 계셨기 때문에, 그 증거를 시각적으로 보여 준 것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통해 부활의 영광과 재림의 영광을 미리 보여 주신 것이고, 또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로서의 예수님의 권능과 영광을 잠깐 드러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고난을 받으신 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면 변화 산의 경이로운 변화와 그의 영광이 오늘 이 시대에도 우리를 통해 재현 될 것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8. 오늘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면,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그 분의 임재 하심을 통하여 그의 영광이 우리의 삶을 변화 시키고,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또는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완수 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변화 산상의 영광스러운 변화가 오늘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재현 될 수 있도록 말씀에 순종하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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