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3.18.예수는 당신의 누구입니까?(마가복음15:6-15)

[성경본문] 마가복음15:6-15개역개정

6.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7.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8.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9.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0.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11.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12.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13.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15.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제공: 대한성서공회

예수는 당신의 누구입니까?(마가복음15:6-15/2018.3.18.오전)
1. 어려서 부터 부모님이 모범생인 형과 비교를 하면서 늘 자신을 책망하고, 형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런 부모 밑에서 우울하게 자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성장하여 형은 훌륭한 정치가가 되었지만, 동생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형님처럼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어느 날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내가 유명한 사람을 죽이면 나도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1865년 4월14일, 포드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하던 링컨 대통령은 가톨릭교도이며 남부군의 지지자인 죤 부스에게 저격을 당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의 목숨은 이렇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사도바울도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귀신들려 점을 치는 사람을 고쳐주고는 억울하게 매 맞고 빌립보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빌립보 감옥을 흔들어 바울을 포함한 모든 죄수들의 착고와 묶임을 다 풀어 주셨지만, 이미 사도바울의 신앙과 인격에 감화된 사람들은 한 사람도 도망을 가지 않았습니다.
이런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간수장은 마침내 사도바울에게 무릎을 꿇고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고 간청하였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0-31) 는 말씀을 받고 즉시 세례를 받고 온 가족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인생은 이와 같이 만남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복된 만남도 잘못된 생각이나 오해로 인하여 인생을 망치는 경우도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생각지도 못한 만남을 통해서 인생의 길이 열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 사람과의 만남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 사람을 보내 주셨으며, 이런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2.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한 사람인 가롯 유다는 세례요한의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 때 요한이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낼 때, 가롯 유다도 함께 따라가 예수의 제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헌금을 관리하는 회계를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동고동락 하면서도 다른 제자들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으면서도 그의 마음이나 인격이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변화가 없는 가롯 유다는 마침내 예수님의 설교보다는 자꾸 물질에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하였고, 결국에는 그 유혹에 넘어가 자주 돈주머니에서 예수님이나 다른 제자들 몰래 헌금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 옥합을 깨뜨려 순전한 나드 향유를 그 몸에 전부 부었을 때 제일 분노한 사람이 바로 이 가롯 유다였습니다.
요12:5절을 보면, 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인 6절을 보면, 가롯 유다의 핵심을 찌르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했습니다.
우리 주의에 보면 유독 가난한 자들의 편을 들고 그들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고 그들의 인권을 대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에 이미 드러난 자들의 정체를 보면 이 가롯 유다 처럼 그 목적이 다른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아나 과부,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라고 하셨지, 그들을 이용하라 고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3. 어쨌든 막달라 마리아는 이제 곧 십자가의 고난을 받아 죽으실 예수님의 그 장례를 위하여, 누구도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노동자 1년 치의 품삯에 해당하는 자기의 보물인 순전한 나드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님의 몸에 부어드렸습니다.
그 때 유다는 많은 돈을 가로챌 목적이 실패하자 마리아의 행위에 분노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교회에 세례신자로 이름을 올리고 신앙생활 하지만 영적으로는 예수와 아무런 관계도 없이 적당히 종교생활이나 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롯 유다는 바로 이런 사람들 가운데서 나오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은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반드시 변화를 가져오기 마련인데, 아무리 믿어도 변화가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육신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언제 그 사람들을 유혹해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예수님 처럼 될 것인지 생각하지 않고,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물질의 욕심과 자기의 개인적인 야망을 실현하고자 하였고, 마침내 예수를 배신하고 그를 팔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을 자기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물질의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가 배신하기 위해 예수님을 떠나 유월절 만찬 석상을 빠져나갈 때는 밤이었다고(요13:30)했습니다.
그야말로 인생의 고통의 밤, 멸망으로 내려가는 밤이 시작된 것입니다.

4. 우리가 전도자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믿음의 생활을 시작한 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지 못하면 결국 우리는 다른 곳에 초점을 맞추게 되고, 마침내 자신의 삶을 내가 원하지 않는 곳에 빼앗기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그는 예수님을 떠나 파멸의 밤으로 나갔으며, 배신과 죄악의 밤으로 그리고 영원한 형벌의 밤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도 그 분을 향한 입맞춤이 사랑의 입맞춤이 아니라 배신의 입맞춤이요 그것이 예수님을 잡는 신호였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돈 때문에 망했습니다. 자기의 더러운 욕망이 자기를 망치고 말았습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만나면 새사람이 되고, 지금까지는 내 자신을 위해 살았던 사람도 변하여 남을 위해 살게 되고, 복음을 전하며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생명을 건지는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만 하여도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가롯 유다 처럼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아들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은 불과 12명의 제자들과 소수의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롯 유다는 만남에 복을 받은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례요한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난 이 만남이 내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으며, 이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생각이나 인생의 목적이 다른 곳에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5. 결국 그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고 보니, 스승을 은30냥에 팔아넘긴 배신의 행위에 대하여 후회와 번민으로 고통 하다가 결국 목을 매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목을 맨 끈이 유다의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끊어지는 바람에 땅에 떨어져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와 처참한 모습으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스승을 짐승처럼 배신하고 판 돈 은 30개는 하나도 사용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히3:1에 보면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돌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이 복된 만남을 영원한 축복의 만남으로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저주의 만남 고통의 만남으로 끝낼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복된 만남을 가롯 유다만 망친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대제사장들이 시기심에 가득하여 예수님을 재판에 넘겨 준 것을 빌라도 총독도 잘 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제사장이 누구입니까?
제사장들은 백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고, 특히 백성들의 죄를 자기의 죄처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대신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께 죄의 용서를 비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들이 그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 11절을 보면 경악할 만한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이것은 빌라도 총독이 유대인들에 의하여 고소된 예수를 보니 아무런 죄가 없고 다만 종교적인 문제라 생각하고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백성들을 향해 명절에 죄수 중 한사람을 풀어주는 풍습을 따라 살인자 강도 바라바나 예수 중에 한 사람을 택하도록 할 때, 이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오도하여 살인 강도는 무죄로 살려내고, 죄 없는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그렇게 백성들을 충동질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6.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사명을 망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구두 수선공이었던 윌리엄 케리는 영국인으로 19살에 어느 기도 모임 중에 큰 은혜를 받고 이후의 모든 생애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마침내 32살에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해외 선교에 눈을 떠서, 개신교 역사상 최초로 해외 선교를 위한 런던선교회를 만들었고, 1793년에 위험한 지역인 인도에 선교사로 파송되습니다.
그러나 전도의 열매는 없고 의사로 함께 동역하는 선교사가 공금을 횡령할 뿐 아니라, 5살 짜리 아들 피터를 잃었고, 아내는 정신적인 질환을 앓으며 남편의 사역을 방해하였으며, 한 때는 화재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도 했지만, 그런 난관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성경을 번역하여 힌두어, 중국, 버마, 말레이 등의 44개국 지역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면서 어린아이를 신에게 희생 제물로 드리는 그런 악습을 폐지하면서, 현대선교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윌리엄 케리의 희생이 19세기 열방을 향한 세계 선교의 새로운 문을 열게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귀한 믿음의 선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통해 감화를 받기 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망각한 정치인, 종교인, 지식인, 문화인, 가장이나 부인들,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기의 사명을 망각한 사람이 가는 길이 어떤 길입니까? 멸망의 길입니다.
제사장들이 죄 없는 예수님은 십자가형으로 죽게 만들고, 살인강도 바라바를 무죄로 놓아주게 함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7. 주후 70년 로마 디도장군이 군대를 끌고 와서 예루살렘을 피 밭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군중들과 그들을 죄 짓도록 선동한 제사장들의 죄 값이었습니다.
죄가 왜 무서운가 하면, 나중에 그 죄를 지은 본인을 찾아와서 반드시 그 죄 값을 치르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영원한 고통과 슬픔과 멸망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롬6:23).
정치, 종교, 교육, 문화를 가리지 않고 지도자들이 올바르게 가르치고 행동하지 아니하면, 결국 그 죄는 자신들은 물론이고 그 자녀들에게 까지 재앙으로 임함을 알아야 합니다.
한눈 팔지 말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을 목숨을 걸고 지킬 때, 지도자들도 복을 받고 가르침을 받는 백성들도 복 되고 평안한 길로 가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죄 짓지 말아야 합니다. 바르게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실패하고 죄 중에 넘어지더라도 속히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잘못 가르치고 잘못 인도하는 지도자 때문에 인류 역사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왔습니다.

8. 마지막으로 빌라도 총독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권력을 주실 때는 그것을 바로 사용해서, 첫째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사용하고, 그리고 백성들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는 지도자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권력자들은 이 일에 실패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떠나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던지 다 마지막에는 심판입니다.
본문 15절에,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21세기의 어떤 나라의 모습하고 너무 닮은 것 같습니다.
요19:8절에 보면, 빌라도가 왜 이렇게 결정을 내렸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총독의 권한을 가지고도 백성의 눈치를 살피고 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권력자로서, 선과 악을 분별하는 재판장의 권한에 대한 사명을 망각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공정한 법을 가지고 그것을 선악을 분별하는데 사용하기 보다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를 보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었기 때문에 재판을 굽게 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영접하기 보다는, 백성들에게 환심을 얻고 지지를 얻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지지나 환심은 지금은 대단한 것처럼 보여도 잠시 잠깐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언제 무슨 일로 등을 돌리고 대적할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순결을 지키고, 도덕과 법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 종교나 교육이나 언론이나 문화적인 것이던지 그것을 바르게 표현하고, 그것을 통해 의와 거룩함을 드러내는 사명을 감당할 때, 이 사람은 역사의 주인이 되고 만인의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사람들은 제사장들의 선동에 속아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그 죄를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리라고 소리쳤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소리인 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함부로 장담하고 생각나는 대로 말해서는 안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완전한 멸망이 저들의 말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9. 그러면 우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요1: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온갖 죄 문제, 인간의 연약함, 우리 영혼의 문제, 내세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믿고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서 고통하며 방황하는 우리를 영원히 다시 살리시며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임을 믿어야 합니다.
가롯유다나 빌라도나, 대제사장들이나 수많은 백성들은 예수를 이용하거나 배척했지만, 그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2천 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나를 사랑하사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신 나의 영원한 구주가 되심을 믿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모든 만남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귀하게 여기면 그 만남은 복 된 만남입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저와 여러분의 만남이 있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일생에 놓칠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복 된 만남이요 축복인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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