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4.3.불쌍히 여길 때(누가복음10:25-37)
[성경본문] 누가복음10:25-37개역개정
25.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제공: 대한성서공회
| 불쌍히 여길 때(누가복음10:25-37/2016.4.3.오전) 1. 현대사회는 핵가족 시대입니다. 5년 전의 일본 통계를 보면, 일본의 단독세대수는 1,678만 세대를 넘었고, 이것은 인구의 8명 중에 한 명이 혼자 산다는 결과입니다. 혼자 살다보니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족은 물론이고 이웃도 친구도 친척도 없이 오직 자신의 목적 성취를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가다 보니, 자기중심의 삶이 인격의 기본으로 형성되고 말았고, 자기만족을 위해서는 부모나 자식도 죽일 수 있고, 나를 위해서라면 사람도 납치하고 감금하고 폭행하며, 남의 재산도 강탈하는 것에 대하여 거부감이 없이 살아가는 그런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옛날에는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혼자의 힘으로는 농사를 짓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자연히 가족의 도움이나 이웃의 힘을 빌려야 했고, 그래서 공동체라는 것이 존재하고, 이 공동체를 이끌어나가는 지혜롭고 강력한 리더가 필요했기 때문에, 가정도 자연히 대가족제도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핵가족 시대는 각자가 살아가는 환경과 조건, 처한 상황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가족이라고 해도 서로 생각이 다르고 삶의 모습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한 가족이라고 해도 함께 둘러앉아서 함께 밥을 먹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한 가족이라도 함께 모여서 밥을 먹을 수 없다면 남남이라고 말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각각 식사를 하는 시간과 장소와 내용이 다르다 보니 개인주의가 안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이런 21세기를 내다보고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2. 우리는 본문에서 강도 만난 한 유대인의 위기를 보면서 이 시대가 결코 안전한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개인의 상황에서부터 시작해서 전 지구촌의 상황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문제들을 껴 앉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환경이나 조건들 가운데에서 우리는 무수한 강도를 만나며 그것 때문에 고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닥치는 질병의 강도며, 사업의 실패라는 강도며, 환경이 주는 재앙이라는 강도, 부모 자식 간에 일어나는 살육이라는 강도며, 사기꾼에게 걸리고 고소를 당하고, 애매하게 당하는 재앙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재앙이 결코 악인들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삼촌과 그 사촌들이 강도였습니다. 요셉의 경우는 형님들이 강도였습니다. 다윗은 장인어른이 강도였습니다. 욥은 마귀가 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인생의 강도를 만났을 때 과연 누가 도와주었고, 구원의 손을 내밀어 주었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정직하고 살고 의롭게 살고 믿음으로 살았던 이 사람들도 강도를 만나는 이런 어려움을 만났을 때 아무도 도와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인생 자체가 연약하기 때문에 남을 도울만한 그런 힘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선악을 떠나서, 사랑의 관계를 떠나서 일단 사람이 재앙을 만나고 강도를 만나면 아무도 도와줄 자가 없다는 사실이 우리 인생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의 사람들이 내린 결론이 무엇입니까? 오직 위에계신 하나님만 바라보았고, 그분에게 모든 소망을 걸었습니다. 3. 오늘 본문의 강도 만난 사람은 유대인으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고, 있는 소유물을 다 빼앗기고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로 폭행을 당했습니다. 그대로 두면 죽을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로 지나가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강도만난 이웃을 보고는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도 강도 만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도 그런 모습을 보자마자 피해서 도망갔고, 레위인도 멀리서 보고는 놀랜 토끼마냥 도망갔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은 행동으로 강도만난 유대인을 못 본척 하거나 놀래면서 도망갔습니다. 오늘 우리도 세상에서 이런 강도를 만나면 똑같은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하면 나를 도와줄 수 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여러분이나 목사도 이 일은 마찬가지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람들이 선하고 나쁜 것은 둘째고, 내 살기도 벅차고, 내 문제만 해도 태산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냥 놔두어도 쓰러질 판인데 과연 누구를 도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날 도울 자가 없다고 해서 남을 원망해서도 안됩니다. 문제만나고 강도만난 내 자신이 스스로 도울 힘이 없는 것처럼, 그 사람들도 힘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마15:14) 하셨는데, 그런 맹인의 손에 붙잡혀 문제가 해결되고 살아나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강도를 만났을 누가 손을 내밀며 누구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까?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고, 오직 그에게 소망을 두었습니다. 3. 강도만난 사람을 한결같이 그냥 버려두고 지나갈 때,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보고 도망갔는데 이 사람은 강도 만나 피 흘려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는 반대의 행동을 취했습니다. 34절에 보니 가까이 갔다고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33절에 보니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다가간 것입니다.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우리 마음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 있으면 두려움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 있으면 어떤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마치 제 자녀를 제 목숨처럼 사랑하는 어머니처럼 그런 마음입니다. 그러나 내가 먼저 살겠다고 생각하고, 남은 죽어도 나는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 생명은 더 소중해지고 소중해지는 만큼 두려움은 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침몰해버린 세월호 선장처럼 사명도 체면도 양심도 없이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강도 만난 사람은 유대인이고 그를 보고 불쌍한 마음에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이 가장 멸시하는 사람입니다. 과거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자 그 지역에 많은 이방인들을 이주시켰기 때문에, 사마리아지역은 혈통적으로 혼잡해 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로 정통성을 강조하는 유대인일수록 사마리아 사람들을 배척하고 미워하고 멸시했던 것입니다. 4. 그런데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는 한 사람의 유대인의 생명을 구원하고 은혜를 베푸는 일에 정통성을 자랑하는 유대인을 사용하지 않고 도리어 멸시받는 사마리아 사람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 본문의 말씀은 사실이 아니라 예수님이 사용하신 예화에 불과하지만, 이 이야기는 당시 상황으로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던 일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대한 중요한 교훈으로, 현실에 일어난 사건보다도 더 중요한 소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처하는 정통 유대인들에게도 없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이 이방인의 가슴에는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갖지 못했던 그런 마음, 그런 행동이 멸시받고 차별받는 사마리아인의 삶 속에는 남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 중에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일, 즉 강도만난 자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그를 치료해 줄 수 있었던 용기가 이 이방인에게는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무엇인가?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요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종교성 하나만을 내세우며 이방인을 무시하면서 교만하게 행세하던 유대인을 구원하는 일에 이방인을 사용하신 것은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요 신비입니다. 5. 그렇다면 오늘날 개인주의로 병든 세상과, 강도만나 고통하는 우리 시대를 치료하고 살리는 것은 물질이나 과학이나 복지정책도 중요하지만, 이런 것 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사람을 볼 때 서로가 불쌍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일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기록하기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롬12:15-18) 고 했습니다. 특히 함께 운다는 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과 강도만난 유대인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남남이요, 사실은 종교성이 강한 사람일수록 원수로 여기는 관계였습니다. 그런데도 위기를 만난 사람을 보고 지체하지 아니하고 도움을 줄 수 있었던 이유는, 유대인과 이웃하며 살면서 온갖 차별과 멸시를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고난당하는 자를 향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동족이 어려움을 만나 생명이 위급할 때 그를 돕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요 귀찮은 일로 여겨 도망갔지만, 하나님은 이 사마리아인에게 증오와 분노와 미움 대신에 불쌍히 여기는 귀한 마음을 주셨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3번씩이나 “그를 보고”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는데, 우리가 무엇을 보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보고 나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행동을 일으켰는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6.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이런 현장을 보았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본문 37절에 보니 예수님의 말씀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미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풍성하도록 부은바 되었으니, 예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같이 우리도 사람들을, 특히 고난당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34절에 보니 이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의 소중한 기름과 포도주를 강도 만난 자의 몸에 붓고 상처를 치료할 수 있었던 것은, 한 생명의 가치, 그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보고 도망하는 자가 아니라, 보면 볼수록 강도만난 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은혜를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랑의 사도로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시고 놀라운 축복을 부어 주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때, 하나님은 복음의 문을 열어 주시고, 하늘 문도 열어주시고, 구원의 문도 축복의 문도 다 열어주시는 줄 믿습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바로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요, 바로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 대신하여 받은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7.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사명은, 병든 심령을 치료하고, 이 세상에서 강도만난 자의 인생을 살리고 건지면서 영생의 복음을 전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율법사는 예수님에게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당연히 유대인들은 경멸의 대상이었던 사마리아 사람, 이방인들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들이 너희가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을 이웃이요, 그들이 어려울 때 도움을 베풀어 주어야 할 이웃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증오와 미움과 차별과 경멸의 대상이 아니라 무조건 사랑해 주어야 할 상대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면서,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