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8.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누가복음17:11-19)

[성경본문] 누가복음17:11-19개역개정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제공: 대한성서공회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누가복음17:11-19/2015.11.8.오전)
1. 원숭이 같는 동물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그것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대부분이 손에 있는 것을 빼앗듯이 낚아채어 달아납니다.
매일 반복해도 그 태도는 바뀌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첫째는 동물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사람을 불신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짐승의 세계의 특징은 감사가 없는 세계입니다.
지구상에서 공산주의가 망한 것은 원숭이처럼 빼앗기만 할 줄 알지 감사가 없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은혜로 얻은 것이 아니라 제 힘으로 강탈했기 때문에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으로 살면서 감사를 잃어버렸다는 것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고통 받고 있는 삶이요 동시에 벌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10명의 문둥병자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에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 중에는 10명의 나병 환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나병은 율법의 말씀을 범했을 때,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질병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버림당하고 격리 당해야만 했습니다.
성안에서 살 수 없으며, 사람들 가까이에도 갈 수도 없었습니다.
사람이면서도 사람 구실을 하나도 할 수 없는 한 마디로 비참한 인생이었습니다.

2. 그렇다면 무엇이 이 사람들을 이토록 비참하게 만들었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가 이 사람들의 인생을 망하게 만든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욕심을 위해서 하나님을 떠나 범하는 모든 죄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두려움과 불안과 질병을 주며, 마지막에는 심판 받고 멸망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사람들이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감히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멀리서 부르짖는 이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 때에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이미 그들의 저주받은 몸뚱이를 깨끗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제사장은 백성들의 종교적인 문제뿐만이 아니라 의료문제도 담당했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의 병든 것을 확인하고 격리를 시킬 것인지 어떨 것인지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병을 치료 받아 집에 돌아가려면, 제일 먼저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해야 했기 때문에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이미 몸이 깨끗하게 치료된 것을 알았습니다.

3.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우리도 다 같은 나병환자와 같은 인생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성공하고 잘 나가고 인기 있고,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들을 많이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고 그런 사람을 좋아하고 가까이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 안에 욕심과 정욕으로 가득 채우고,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옛날 같으면 나병에 걸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욕심을 내고, 하나님의 은혜도 외면하고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내가 원하는 대로 성공은 했습니까?
세월만 가고 몸과 인생은 망가 질대로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비참한 인생들입니다.
그런데 더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무시하고 외면하고 돌아보지 않습니다. 불쌍히 여기지도 않습니다.
혹시 사람들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동정한다고 해서 우리 인생이 새로워질 수 있습니까?
영적인 문둥병에 걸려 신음하는 우리를 사람들이 동정하고 도와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인생의 한계입니다.

4. 나병은 성경적으로 보면 부정한 병이고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에서 나타나는 병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그의 은혜를 구할 수도 없는 그런 병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멀리하고 가까이 다가오는 나병환자에게 돌을 던지고 고함을 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사람을 가까이 하시고,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부르짖는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병든 사람의 심정을 모르고, 배부른 사람은 배고픈 사람의 형편을 모르듯이, 남의 나라에 살아 보지 않은 사람은 이방인으로서 차별받는 삶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주님을 차별했습니다.
10명의 문둥병자를 치료하실 때 조건도 없었고, 대가도 없었습니다.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도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소망이 없는 불쌍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14절에 보면 “보시고 이르시되” 라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말하지 않아도 그들의 형편이 얼마나 처참하고 불쌍한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차별하고, 분석하고, 이리저리 따지고 생각이 많지만,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대우해 주셨습니다.
이유는 다 죄인이고 이 죄 문제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해결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남녀의 차별, 빈부의 차별, 건강이나 외모의 차별이 없습니다.
다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고,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시면서, 나아오는 자들에게 쉼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5. 그런데 오늘 본문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의 중심이 무엇입니까?
10명의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사장에게 자신들의 몸을 보이려고 가던 도중에 몸이 깨끗하게 된 사실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반신반의 하면서 가다가 도중에 일어난 기적입니다.
주님은 10명의 나병환자를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치료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치료받고 깨끗함을 받은 사람은 10명인데, 예수님께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감사를 표시한 사람은 이방인 한 사람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아홉은 다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주님도 그것이 궁금해서 17절에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제사장에게 자신의 몸을 보이려고 달려가다가 자신의 몸이 깨끗함을 입은 것을 알았다면 당연히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올 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기다리신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너희를 고쳤으니 당연히 나에게 사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죄로 말미암아 고통과 저주 속에 빠져 신음하는 인생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구원받고 죄 문제와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받고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가운데 살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무슨 대가를 받고 인사치례를 받기 위해서 그들을 찾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단순하게 병만 고침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전인격적인 구원과 더불어 참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6. 1983년 10월 9일, 미얀마를 친선방문 중이었던 전두환 대통령 일행을 북한이 암살하려고 테러를 했는데, 그 때 대통령은 길이 막혀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그 일행이 화를 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도착했던 6명의 각료들을 포함해서 많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때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장관 등 정말 귀하고 아까운 인재들을 많이 잃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미얀마는 북한과 국교를 단절했습니다.
대통령 이하 모든 사람들이 일정을 취소하고 부랴부랴 귀국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김포공항에 새벽에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동료들이 억울하게 죽었는데 자신은 살아 돌아왔으니 기가 막혔습니다.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어디로 갈까요 하니, 시계를 보니 교회 새벽기도 시간이었답니다. 그래서 교회로 가자고 했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생명을 구해주신 하나님께 저절로 감사가 나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평안하고 일이 잘될 때 감사가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는 내가 정말 어려울 때, 고통스럽고 아무도 도와주는 자가 없을 때, 그 때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를 쏟아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행복하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기 때문에 내 가슴에 행복이 물결치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니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이방인 한 사람이야말로 은혜를 깨닫고 감사를 통해 참 행복을 맛본 사람이었습니다.

7. 축구를 보면 월드컵 같은 매우 중요한 시합에서 자주 보는 광경인데, 어렵게 한 골 넣고 나면 어떻게 합니까?
선수들끼리 얼싸안고 한 덩어리가 되어 환희에 가득차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시합에 나가서 골 하나를 넣어도 이렇게 기쁜데 저주받은 문둥병에서 해방되었으니 이 기쁨이야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 미국 미시간에서 배 한 척이 파선했는데, 그 때 마친 수영 선수가 타고 있다가 23명이나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토레이 목사님이 설교 중에 이 실화를 이야기 했더니, 예배를 마치고 한 노인이 목사님에게 가까이 와서 하는 말이 목사님, 그 때 수영 선수가 바로 저입니다, 하더랍니다.
목사님은 놀라면서 그 사건을 통해 당신이 받은 감명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한 사람도 나에게 고맙다는 말한 사람이 없고, 전화 한 통, 카드 한 장 보내 온 사람이 없었는데, 이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고 합니다.
사람의 생각은 수시로 바뀌기 마련입니다.
지금 감사가 내 마음에 넘쳐도 돌아서는 생각이 바뀌고 그래서 감사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물론이고 사람에게 대한 감사도 돌아서기 전에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도 말하기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3) 고 했습니다.
 
8. 주님이 찾으시는 나머지 아홉 명은 어디로 갔습니까?
지금까지의 내 병은 나병이 아니라 피부병이었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간 것입니다.
나병이 무서운 병이라도 이제 나을 때가 되었으니 나은 것뿐이라 생각했습니다.
재발할지 어떨지 두고 봐야 하니 그대로 간 것입니다.
그래도 예의 바른 사람이 있었다면, 목욕하고 옷 갈아입고 예수님께 정식으로 인사를 가겠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 이 한 사람은 최우선으로 예수님께 달려가 감사부터 먼저 했습니다.
예수님이 기다려도 오지 않는 아홉 사람을 당연히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18절에 보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병으로 인해 잃어버린 인생을 회복하고,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당연한 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돼지처럼 먹고 욕심만 부리면서 제 멋대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아름다운 존재로 창조된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참된 복을 받으며 누가 참된 행복을 소유하며 누가 영원한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까?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해 보면, 감사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9. 그렇다면 제 몸의 깨끗함을 알고 다시 돌아와 주님께 감사한 사람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19절에 보니,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 안에 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믿음이 대단해 보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을 보면 감사가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 사람들의 믿음은 자기만족의 믿음이요 하나님의 영광과는 상관이 없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이런 행위에 속아 넘어갑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아는 이 이방인 한 사람에게 주님이 주신 것은 참 믿음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주님 자신도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은 자기만족의 믿음, 자기 원하는 것을 성취하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믿음이었지만, 이 사람의 믿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제 스스로를 구원하는 큰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후에 그 어떤 인생의 역경과 문제를 만나도, 어떤 질병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믿음으로 이미 무장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가던 길을 되돌아가면서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듣도록 자기 몸에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을 찬송하고 간증한 것입니다.
둘째는, 주님께 엎드려 감사하는 이 행동이 그의 믿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 앞에 나와서 잃어버렸던 감사를 회복하면, 세상이 줄 수 없는 쉼을 얻고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새 힘을 얻고 소망 찬 삶을 살 수 있으며, 더 많은 감사로 축복이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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