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3.3.순종하는 아들처럼(마태복음 21:28-32)

[성경본문] 마태복음21:28-32개역개정

28.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제공: 대한성서공회

순종하는 아들처럼(마태복음 21:28-32/2013.3.3.오전)


1. 제가 지난 한 주간 동안 생각한 것들 중에 한 가지는 한국 교회가 사랑에 관해서는 가장 아름답고 좋은 말들을 많이 하고 있지만 정작 교회 안에서는 사랑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우리가 잘 아는 대로 많은 교회들이 지금 크고 작은 분쟁 가운데 있는데 그 안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일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고전13:4)했는데, 아무도 오래 참으려고 하지 않으며 온유한 자보다는 진리를 내세우며 분노의 칼날을 휘둘러 대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한국 신문을 보니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서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순간적으로 쳐 죽이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부모들의 책임인 것은 자녀들을 바로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분노가 일어날 때 그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치고 훈련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의 감정들을 억제하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결과가 무엇이며, 인간을 가리켜 왜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표현하는지에 대해 교육하고 이해시키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주님의 몸 된 교회 역시 이런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사랑은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이해해주고 용서해주는 것인데 우리는 그런 감정과 태도를 받으려고만 하지 남에게 줄줄 모르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의 사람들에 대한 감정은 한마디로 불쌍히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병든 자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물론이고 모든 죄인들을 향한 그 분의 감정은 긍휼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베어버린 베드로를 향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것까지 참으라”(눅22:51)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사회는 지금 모든 사람들이 차별 없이 잘 먹고 잘 살고 사람대우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참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그런 훈련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한 사람만 참으면 가정도 행복해지고 교회도 평안해지고 나라와 민족은 더욱 더 번영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오늘 본문의 말씀은 두 아들에 대한 교훈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거듭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것이 단순하게 어느 농부의 두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주위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소위 종교 전문가로 불리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경우는 대부분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남다른 환경과 조건 속에서 태어나고 그런 곳에서 교육 받으며 자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쪽에는 불행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버림받은 세리와 창녀 같은 사람들과 가난과 질병으로 종교에 관심을 갖고 싶어도 그럴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좋은 환경에 좋은 교육을 받고 그래서 종교적으로도 열심히 살았다고 다 훌륭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반대로 세리와 창녀들처럼,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이라고 다 나쁜 길로 가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아들의 이야기는 바로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환경과 조건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 그래서 종교적인 권위와 사회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그리고 성경말씀에 능통한 사람들이라도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야를 거절하였고 그를 미워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사람들을 말로는 순종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아버지께 불순종하는 첫째 아들 같은 사람들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세상에서 소외되고 버림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지만, 도리어 예수님을 통하여 천국을 발견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복된 이 사람들을 둘째 아들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할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참된 순종이요, 그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태생이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보면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할수록 사람들은 점점 겸손해지고 온유해지며 예수님을 닮아가기 마련입니다.
눅 22:42절에 보면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님의 기도가 나옵니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 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라도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보다는 예수님 자신의 뜻대로 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육신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일반적인 감정입니다.
그것이 힘들고 어려운 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한계점에 도달하는 일이라면 더욱 순종하기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도하면서 마지막 순간에 선택한 것은 자기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르는 일에 대해서는 용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잘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잘 할 수 있다고 장담도 하고 또 열심히 하려고 노력도 합니다.
그러나 점점 일의 어려움을 알면 알수록 사람들은 쉽사리 승낙하고 일을 시작한 것을 후회하고 잘못 결단한 스스로에 대해서 원망하기도 합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4. 인류의 조상 아담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불순종함으로 그를 통해 이 세상에 죄와 고통과 죽음이 들어오고 말았습니다.
이 거역하는 죄가 지금 우리 가운데 있어 늘 우리의 주인처럼 행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남과 비교하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고, 거역하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속에 순종이 아닌 불순종이 인간의 본능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용이 아니라 거부하기를 좋아하고, 화해하기 보다는 투쟁하기를 좋아합니다.
불순종한 아담 한 사람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이렇게 불만과 비판과 불순종, 그리고 모든 사람을 향한 분노와 미움으로 가득 채우기 마련입니다.
일본의 어떤 선교사는 제게 일본 사람들의 뇌는 한국 사람들의 뇌와는 다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사고의 출발점이 우리와는 다르고, 그 사고를 구체화시키는 과정의 방법도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그런 취지의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그 말의 뜻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같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같은 말씀으로 한 솥의 양식을 먹는 사람들끼리도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으로 싸움질을 하고 있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반대를 위한 반대, 싸움의 구실을 만들어 분쟁 속에서 제 삶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의인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당연히 순종이라는 사실입니다.
잘난 척 하고 똑똑한 종교지도자들은 교만과 불순종과 의심에 빠져 방황하고 있을 때, 멸시와 천대를 받던 세리와 창녀들은 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5. 이런 사실을 놓고 볼 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지 아니하고는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에게는 미래가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안식도 평안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란 존재를 학문의 한 영역으로 인식하고 그에 대하여 연구하며 많은 노력을 쏟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들의 연구의 대상이나, 학문의 영역에서 발견되어지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세상 만물과 인간을 자신의 뜻대로 창조하시고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심으로 인간이 그 존재를 깨달아 알 수 있도록 도우시며,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의지대로 운행하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된 인간이 그분에게 나타낼 수 있는 합당한 반응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분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함으로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인간으로서 선택의 여지가 도무지 없는 것은 그 분 스스로가 우리에게 순종할 것을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인간이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는 분이 아니라 반드시 믿고 순종함으로 따라가야 할 유일한 분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어떤 자세로 읽고 있습니까?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즉 믿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성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바로 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에 맞는 것은 믿고, 그렇지 못한 것은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에 대항하는 것이요 이것은 마귀의 불순종하는 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6. 문제는 왜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내가 순종하고 싶어서 순종하고 내가 불순종하고 싶어서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말씀도 내가 믿고 싶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여 믿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에 믿는 것처럼, 순종하는 사람 속에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불순종하는 사람의 속에는 불순종의 영이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순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순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불순종은 마귀에게 속한 것이라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2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의 순종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입술의 순종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의 순종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아버지의 뜻에 순종할만하니 순종하고, 순종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니 그래서 불순종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겉으로는 부드럽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순종하는데 사실 속으로는 이를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무감각하게 기계처럼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순종이 아닙니다.

7.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으시는 진정한 순종은 어떤 것입니까?
진정한 순종 속에는 예수님의 영이 계시며 그 분의 감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아니하고, 어려운 환경에 처해도 아니오라고 말하지 아니합니다.
사람이 보고 생각하는 것에 쉽사리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마6:1절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는 말씀이 있는데,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그래서 외식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 자녀된 자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당연히 감사와 기쁨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부모님에게 순종해도 복을 받고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집을 비운 사이에 우리 집안의 전구들이 LED로 바뀌었습니다.
늘 바꾼다고 하면서 경제적인 이유로 미뤄오던 것을 아들이 제 돈을 들여가며 다 바꾼 것입니다.
제 마음이 기쁘고 든든했습니다. 아들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어렵고 잘 깨닫지 못하는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가정이나 인간관계를 생각하며 그것을 하나님으로 대조시켜 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내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했을 때 우리 하나님도 이렇게 하면 기뻐하시겠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도 순종하는 삶은 내 마음 먹기에 달렸습니다.
신구약 성경에서 가장 많은 약속이 무엇입니까? 순종하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두 아들의 의지나 생각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아들과 그렇지 못한 아들의 모습입니다.

8. 그렇다면 불순종하는 큰 아들처럼 하면 어떤 결과가 주어집니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처럼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가 되기 마련입니다.
31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지연되거나 불가능하게 됩니다.
또한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다는 것은 진정한 회개가 없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나 32절에 보면, 세리와 창기들은 어떻습니까?
지금까지는 둘째 아들처럼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께 욕되게 살았다할지라도, 이제는 그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참 아들딸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스스로 뉘우치고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디서 참된 순종을 배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바울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님을 가리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빌2:6-8)셨다고 했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 아버지의 뜻을 마지막까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실 물도, 먹을 음식도 누가 가져다주기를 원하고 자기는 앉아 먹으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도 밥도 가져다주는 남들보다 먼저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청소 해 놓은 곳에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가서 청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우리 하나님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죽기까지 십자가에서 복종하셨기 때문입니다.

9. 그러므로 성도는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을 자꾸 찾아 가여 합니다.
가난한 자를 찾아가고, 병든 자를 찾아 돌아보며, 많은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어야 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회사에서 퇴근하면 집으로 곧장 가지 아니하고 마담이 있는 술집으로 먼저 갑니까? 집에는 가기 싫어서 늦게 들어갑니까?
술집 마담은 내 이야기 다 들어주고, 내 사정을 다 이해해 주고 위로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돈을 주어도 아깝지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자주 바가지를 긁어대고, 바른 말도 오해하고 핀잔주기가 일쑤라고 합니다.
그러니 집도 싫고 아내 얼굴도 보기 싫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공정한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의에 대항하여 항의하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사람들을 선동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오직 사랑을 통해 악을 이기셨고, 하나님을 향한 순종으로 불의를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온유와 겸손으로 교만의 죄를 이기셨습니다.
우리는 처음에는 불순종하고 거역하고 분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까지 그렇게 하면 큰일입니다.
주위에 보면 어떤 사람들은 처음에는 잘하다가 나중에 잘못된 길 불순종의 길로 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성도 복 받는 아들은 비록 처음에는 잘못된 길을 가고 행동이 잘못되어도 나중에 깨닫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까지 잘못된 길을 걸었다고 해도, 오늘부터라도 회개하고 바른 길로 가고, 겸손한 길로 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나중에라도 순종하고 돌아가는 아들을 하나님 아버지는 기뻐하시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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