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4.25.마게도냐 교회가 받은 은혜(고린도후서 8:1-9)
[성경본문] 고린도후서8:1-9개역개정
1.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2.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6.그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그가 이미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 하였노라
7.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8.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
9.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제공: 대한성서공회
| 마게도냐 교회가 받은 은혜(고린도후서 8:1-9/2010.4.25.오전) 1.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로 인해 비행장이 폐쇄되고 여행객들의 발이 며칠 씩 묶였다가 돌아온 각국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려움을 만나 일시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많은 일들에 지장을 가져왔지만, 공항이나 항공사나 여러 사람들에게서 받은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유럽 쪽에서 발이 묶인 여행객들에게 항공사들이 호텔이며 식사 문제며, 그야말로 출혈 서비스로 손님들을 도왔고, 일본에서도 유럽에서 온 손님들이 나라타 공항에서 발이 묶이자, 그들을 위해 가지가지의 서비스로 그들을 돕는 모습이 뉴스에 나타났습니다. 세상 인심이 야박하고 자기 밖에 모르고 경제에 눈이 어두웠다고 말하지만, 정작 어려움 만나고 보니 사방에서 자기 일처럼 돕는 손길이 많아 나타났습니다. 유럽의 일부 지역의 공항이 열리자 일본항공은 재빠르게 날아가 발이 묶인 자국민의 수송에 앞장을 서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런 소식이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고, 세상에는 아직 사랑이 있어 살아갈만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최근의 뉴스를 접하면서, 과연 현대 교회가 환란 만난 사람들의 선한 이웃으로 존재하고 있는가를 자성해 보았습니다. 2. 주님은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것을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그 곁을 지나가다가 그를 구출하여 데려다가 자신의 비용으로 치료하여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린 일을 예로 들면서, 우리도 이같이 행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신앙적인 박해의 환경에 더하여 흉년이 들어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에 있음을 알고 온 아시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향하여 도움을 호소하는 사도바울의 권면에, 마게도냐 지역에 있는 교회들이 다른 지역의 교회들보다 더욱 열심을 내어 이 일에 참여함으로, 그리스도인의 주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의 적극적인 구제와 헌금 참여를 말하면서, 고린도교회도 같은 은혜에 있기를 바라면서, 그 지역의 교회들이 어떤 형편에서 어떤 자세로 이 일에 임했는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3.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에 머뭇거리면서 지체하고 있는 이 고린도교회에 소개하는 마게도냐 교회들은 어떤 형편에 있었습니까? 첫째로 그들은 환란과 가난 속에 있었습니다.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가 있다고 했는데, 그 은혜는 다름 아닌 가난과 환란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풍성한 연보를 낸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헌금생활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헌금생활은 어렵고, 있으면 있는 대로 어려운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내일 당장 우리가 무슨 일을 만날지 알지 못하는 상황인데, 내 소유의 일부를 헌금으로 드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절에 보니,「환란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이 있었고,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하였습니다. 많은 환란 속에 넘치는 기쁨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산 넘어 또 산이고, 바다의 파도처럼 내 인생을 향해 밀려오는 문제들과 고통 속에서, 일시적인 기쁨은 있을 수 있으나 어찌 넘치는 기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경제적으로 참혹한 상황에 떨어지면 그 비참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 극한 가난이라는 표현은 바닥까지 드러났다는 의미입니다. 담겨 있는 그릇에 아무것도 없는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소위 한국 사람들의 표현대로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먹을 것이 없다보니, 풀뿌리나 나무껍질이라도 배를 채우는데, 그 속에 탄닌 성분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것이 뱃속에 있는 것을 돌멩이처럼 딱딱하게 만들어 변비를 일으키기 때문에 항문이 찢어지지 않으면 배설이 안되는 이런 2중 3중의 고통을 겪기 때문에 그래서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입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과연 헌금이 가능하겠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마게도냐 교회들은 그것도 풍성한 연보를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까? 4. 둘째로 그들은 힘대로 자원하여 이 헌금에 동참하였습니다. 여기「힘대로」한다는 본문의 단어는, 옛날 바빌론 시대에 결혼하는 남자가 자신의 아내를 위하여 식사와 의복을 자기 능력껏 준비하는데서 유래된 말입니다. 가끔 보면, 술이나 노름에 빠져 월급은 물론이고 모든 소유를 탕진하는 집안의 가장들이 있습니다마는, 가장이 가족을 위해 온 힘을 발휘하여 의식주를 준비하고, 식구들의 필요를 공급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느 교회의 신앙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면, 십일조와 감사 등의 헌금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집의 필요를 채우는 것은 성경적으로나, 신앙적 관습으로나 교회의 법으로 보나 당연한 의무입니다. 그런데 이 마게도냐 교인들은「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이 헌금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기쁨이 넘치고, 이 넘치는 기쁨으로 헌금에 참여하여 풍성한 연보를 만들어 낸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구나 이 헌금은 자신들의 교회나, 자신들이 살고 있는 그 지역의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저 멀리 떨어진 유대 땅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돕는 헌금인데도 힘에 지나치도록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우리 교회를 위해서도, 힘을 다하여 드리는 헌금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힘에 지나도록 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5. 그 비결은 5절에 있습니다.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헌금이 신앙적인 박해나 많은 환란을 이기고 풍성할 수 있었던 비결이 자신들을 먼저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연보가 가난을 이기고 넘치는 사랑으로 채울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들이 먼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희생이 자신들의 가진 힘보다 지나치도록 넘쳐난 이유는 강요함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의 받은 은혜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요 영적 본능입니다. 교회 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종교생활 하는 사람들은 헌금 하는 일이 힘들고 괴로운 일입니다. 이는 종교적인 의무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배운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듯이, 은혜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섬김 자체가 즐겁고, 드리는 것이 기쁘고, 헌신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루야마 시게오(春山茂雄)의 베스트셀러인 뇌내혁명에 보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5가지가 있는데, 성욕, 식욕, 집단의식, 정복, 도피의 욕구가 그것입니다. 이러한 본능에 충동되어 행동하면, 뇌속의 모르핀이 분비되어 쾌감을 얻으며 기분을 좋게 만들기 때문에, 욕구에 따라 행동하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개나 고양이는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절대로 하지 않지만, 인간은 가족이나 자신이 속한 어느 조직을 위해 희생하고 수고하는 힘든 일을 할 때에는, 그것을 통해 쾌감을 얻게 되고, 그것이 뇌속에서 베타 엔돌핀을 쏟아내게 하여, 기억력이 좋아지고,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하며, 의욕과 인내력, 창조적인 활동을 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힘들고 피곤하고 귀찮아도 의롭고 명분이 있는 바른 일을 위해서는 수고하고 희생하기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6. 신앙생활을 종교적인 의무로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헌신하고 수고하고 희생해도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지만, 은혜로 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행하면, 우리 몸 자체가 이미 복을 받은 상태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나까다니 아끼히로(中谷彰宏) 라는 사람이 책을 많이 저술하는데, 대부분의 내용이 인간의 생각이나 태도, 사회생활에 필요한 실제적이고 근본적인 내용들이 많습니다. 화장실에 가서 자신이 마지막 휴지를 쓰고 일어서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부자가 될 수 없지만, 없어진 휴지를 갈아 끼우고 나오는 사람은 반드시 부자가 된다는 것 등입니다. 짐승에게는 짐승의 본능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사람의 본능이 있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선민된 자의 본능이 있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헌금을 드리고, 몸으로 헌신하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사람은 과연 은혜 받은 사람의 증거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은 사람들이 보던 말든, 남들이 무엇을 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풍성한 감사가 나오고, 기쁨이 넘치고, 선한 일에도 풍성함으로 나타나는 줄 믿습니다. 이 마게도냐 지역의 교인들이 억지나 명령에 마지못해서 헌금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넘치는 은혜에 감격한 결과로서 나타나는 반응이, 풍성한 연보였던 것입니다. 힘대로 드리고 힘에 지나치도록 드리는 헌금은 주님 사랑 없이는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7. 그러면 이 마게도냐 교회들이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금에 동참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들의 많은 시련과 환란이, 그리고 그들의 가난함이 도리어 은혜로운 역사에 주님의 심정을 가지고 동참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사랑을 맛본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은 남의 배고픈 것을 안다는 말이 있듯이, 굶주려 본 사람은 남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남을 돕고 구제하는 일은 있는 사람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실천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환란 당한 자들도 남들을 돕는 일에,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생명을 구원하는 사역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베풀고 사랑하는 것이, 사람의 소유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능력으로, 받은 은혜로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8. 둘째로, 주님의 부요케 하심을 경험했습니다. 7절에,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하였고, 9절에 가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이 사랑으로 남을 풍성하게 하는 자에게 주님은 그들에게 더욱 넘치는 풍성함으로 채우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영육간에 우리가 잘되고 형통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자신은 가난하게 되셨다는 말씀은, 하늘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자녀된 우리들을 영원토록 부요케 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은 소유가 없어지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가진 소유가 바닥을 드러내면, 이때야 말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타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소유의 경감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심지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자신들의 연보를 사도바울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드렸고, 그러므로 주님의 풍성하게 하시는 약속을 받았으며, 주님의 은혜와 능력이 저들의 삶 가운데 넘치고 말았습니다. 9.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님이 보여 주신 본을 따라 배우고 행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이 극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주님의 본을 따라 행함으로 믿음의 큰 능력을 보인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그렇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7절을 보면, 교린도 교회는 다른 많은 은사에 풍성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행함에는 부족했기 때문에 이 사랑에 동참할 것을 원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경제사정이 어렵다고 헌금을 줄여야 하겠습니까? 내 사정이 어렵다고 어려움 당하는 자들을 외면하겠습니까? 적자가 많다고 십일조를 거부하겠습니까? 우리 안에 지금 무엇으로 충만합니까? 주님은 우리를 위해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는데, 그분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 사랑 없이는 드릴 수 없는 것이 헌금이요 희생입니다. 우리의 생명, 우리의 소유, 우리의 젊음은 다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분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우리는 고통과 영원한 저주 가운데 그대로 있었을 것입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이처럼 극한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헌금을 낼 수 있었던 것은 받은 바 은혜가 큰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한「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9:10)시는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원하는 심정으로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릴 때, 넘치는 기쁨과 모든 일에 풍성한 축복의 역사가 넘치기를 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