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2.22.나그네 인생(히브리서 11:13-16)
[성경본문] 히브리서11:13-16개역개정
13.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나그네 인생(히브리서 11:13-16/2009.2.22.오전)
1. 세계적으로 경기가 어려운 가운데 지금 일본에서는 조용한 붐이 하나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마주 대하면서 사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나 소설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영화「보내는 사람(おくりびと오꾸리비또)」의 내용은 주인공이 실직을 당하고 시골로 내려가서 죽은 사람을 씻기고, 화장을 하고, 옷을 입히면서 그 죽은 사람이 살아 있을 때의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모습을 만들고, 그리고 관에 넣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공개된 뒤 6개월이 지났는데도 관객의 발길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벌써 270만 여 명의 사람들이 극장을 다녀갔고, 지금도 관객들의 발길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내일부터 열리는 미국 아카데미상의 외국어 영화 후보 5편에 선정이 되어 상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번 권위 있는 일본 문학상인「나오끼상直木賞」을 수상한 「추모하는 사람(悼む美と이따무비또)」는 죽은 사람이 살아 있었을 때의 삶의 현장을 찾아가 그 사람들을 자신의 가슴에 담는 일을 하면서 여행을 계속하는 청년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작년 11월에 출판된 이래 벌써 25만 부를 돌파한 베스트 셀러가 된 작품입니다.
이 출판사의 불로그에는 독자들이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들을 적은 글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 스토리의 주인공들은 자신들이 하는 이 죽은 자들과 대면하면서 살아가는 이 일을 사람들이 알아주던 몰라주던 묵묵히, 그리고 성실하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추모하는 사람(이따무비또)」를 쓴 작가는 2001년, 미국의 동시다발 테러 사건과 또한 그 보복으로 아프간을 공격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대량 살상 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이 글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2. 지난 금요일 아침, 우리 교회의 창립 멤버의 한 사람인 정선녀 권사님이 소천하셨고, 어제 장례식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도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우리의 죽음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소천이기 때문이요, 동시에 새롭고도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면, 3가지로 그 사람의 삶을 평가합니다.
첫째는, 장수했는가?
둘째는, 번성했는가?
셋째는, 내세를 준비했는가?
성경에 인생이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고 했으니, 이번 5월이 되면 만 88세가 되니, 장수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남편을 일찍 보내고 홀몸으로 5남매를 길러 많은 자손들을 번성시켰으니 이 또한 인간이 받은 축복 중의 축복을 다 누린 것이니 하나님의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을 만나 믿음으로 구원받아 이제 천국에 올라 가셨으니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연약한 교회를 위해서 매일 새벽마다 첫 전차를 타고 교회의 새벽기도에 출석하여 기도로 하루를 열면서 사셨고, 교회의 더러워진 바닥을 반들반들해질 때까지 닥아내면서 그렇게 교회를 사랑해 오셨습니다.
가장 어려운 시대인 대정 10년 5월13일에 출생하셨고, 1984년 11월25일 우리 교회의 첫 창립 예배에 출석하여, 그 이듬해 12월에 세례를 받고, 1988년에 서리 집사, 2001년에 명예 권사님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정선녀 권사님을 하늘나라로 보내드리면서 그 분이 계시던 빈자리는 24년 간의 믿음의 발자국이 이 교회의 영적인 자산으로 남아 자자손손 교회 가운데서 기념이 될 것입니다.
3. 본문의 말씀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성경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시작하여 모든 믿음의 사람들을 가리켜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그네는 헬라어로 「파레피테모스」로 본토인 곁에서 거주하는자, 다른 말로 9절의 우거인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자신이 거할 정착된 집이 없는 사람입니다.
법적 보장이나 사회적인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임시 체류자들입니다.
더 나아가서 신분상의 제한을 받고, 특히 고대사회에서는 모욕과 경멸, 수치와 감금, 추방과 무고한 죄책을 받는, 그야말로 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교포사회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불법 체류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예외 없이 교회에 출입하는데, 보면 그 삶이 상당히 피곤하고 어렵습니다.
사회적으로 신분에 차이가 있습니다.
문제는 성경이, 세상의 모든 기독자들은 예외 없이 이 세상에서 나그네요, 외국인이라는 것입니다.
4. 나그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 여행지에 내 집이 없다는 것입니다.
14절에 본향을 찾는다는 말은 자기 집이 이곳에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 여행지가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곳이라 할지라도 잠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내 집이 이곳에 없다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입니다. 여행을 해 본 사람은 여행자만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잘 압니다.
오사카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바깥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일단 집으로 돌아가면 쉼이 있고.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그네는 하루 하루가 피곤하고, 불편하고, 때로는 많은 위험과 어려움, 그리고 오해를 만나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집으로 돌아가기까지는 반복됩니다.
여행자에게 어찌 내 집만 없겠습니까? 주권도 제대로 행사할 수 없고, 많은 어려움이 따라옵니다.
아브라함과 믿음의 선배들은 마치 이 세상을 여행하는 나그네처럼 살았던 것은 이곳에 내가 영구히 머물 집이 없을 뿐 아니라, 이곳에 언제까지 머물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왜? 내가 나온 바 본향,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15절에, 표준 새번역으로 보면, 그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나그네는 비록 외지에 잠시 머물러 있어도, 자기가 떠나온 집을 늘 생각하고 그 집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그 나온 바 본향을 성경은 곧 하늘 나라, 하나님의 예비한 성이라고 했습니다.
5. 우리가 육신의 고달픈 삶을 인하여 고통하고 있을 때, 우리 영혼은 우리의 나온 바 영원한 고향인 아버지의 나라를 사모하고, 그 나라에 속히 이르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향을 사모하는 자의 삶이나 그 의식이 어떠해야 합니까?
어떻게 살아야 우리는 영원한 본향에 이를 수 있습니까?
첫째는 영원한 성, 나의 본향을 늘 사모해야 합니다.
10절에,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고 했습니다.
이번 호주의 빅토리아주를 중심으로 하는 대화재로 2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집을 잃고, 삶의 기반이 다 타버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불타는 자기 집을 바라보다가 그만 너무 기가 막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불타는 자기 집을 바라보면서, 타버리고 잃어버리는 것은 집 뿐이라고 가족을 서로 껴 앉고 위로하면서 내일에 대한 소망을 키웠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순교자들은 자신들의 육신의 장막이 무너져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속히 이를 아버지의 나라, 영원한 생명을 더 바라봄으로 그 몸과 마음이 본향을 사모하여 더 뜨거워졌습니다.
6. 둘째는 결코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육신의 고향도 있지만, 우리를 위해 만세 전부터 준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거룩한 성이 있는 줄 믿습니다.
요14:1-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영구히 거할 집이 아닙니다. 잠시 잠깐 머무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소돔성의 룻의 아내는 그 세상 집과 세상에 있는 온갖 보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고로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는 엄청난 재물과 능력을 가지고도 결코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자신들이 나왔다가 다시 돌아갈 본향인 하늘 나라를 사모하며 살았으며,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 약속들이 다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으면서도,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들에 대한 소망들을 결코 버리지 않았던 것은 더 나은 본향인 하늘나라가 저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 본향에 대한 소망은 세상에서 어떤 고통과 눈물과 실패를 당해도 우리에게 이길 힘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에 근심하는 대신에 본향에 대한 소망에 불타야 합니다.
주님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실 때, 그 저주의 십자가, 고통의 십자가, 수치와 죽음을 견딘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7. 셋째는 나그네로서 본향을 사모하는 자의 삶과 신앙을 간증하며 살아야 합니다.
13절 끝에 보면,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의 증거는 인정하였다, 고백하였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고백하며,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아니하고 하늘 아버지의 나라를 사모하며 살아가는 그 나그네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세상 사람들 앞에 증거하고 간증하며 살았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 내 놓은 내 삶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생명의 길을 가는 내 모습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그 사람들에게 예수 증거가 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독자 된 우리들에게 강조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구약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의 삶은 믿음이 아니고는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 믿음이 세상을 이기고, 그 믿음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그 믿음이 오늘 우리에게 증거 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라는 것입니다. 즉 기대하고 바라는 것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어진 것을 확신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장차 죽음과 저주와 고통이 다시는 없는 영원한 본향에 들어갈 기대를 가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8. 세상의 물질과 쾌락과 온갖 좋은 것들은 우리에게 잠시 잠깐의 기쁨과 만족은 줄 수 있지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기쁨은 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법적으로 보장된 정착민의 삶이 우리를 잠시 편안하게 하고, 안심을 줄 수는 있지만 결코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늘 나그네로, 장막 생활에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비로 장막이지만 그 장막에 주님을 모시고 살아감으로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영적 비밀과 보화가 그의 삶에는 넘쳤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나그네요, 외국인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삶과 누리는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맙시다.
우리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가 가까워올수록 우리는 나그네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선배들의 삶이었고, 그것은 하나님이 21세기를 사는 오늘 우리를 향한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백배의 은혜와 축복을 경험하다가 영원한 본향에 함께 들어가는 축복이 오사카중앙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