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19.유오디아와 순두게(빌립보서 4:1-3)

[성경본문] 빌립보서4:1-3개역개정

1.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2.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3.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유오디아와 순두게(빌립보서 4:1-3/2008.11.19)

1. 초대교회에서 처음의 집사들은 남성들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여성집사들의 필요성을 느끼고 점점 여성들의 역할이 늘어나면서 교회 안에서의 그들의 영향력이 강화되어 갔습니다.
본문의 빌립보 교회도 여성들이 많았고, 그들의 영향력은 상당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여성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큰 유오디아와 순두게 사이에 분쟁이 생기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이름을 각각 부르면서 서로 화목할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대립이 빌립보 교회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끼리의 대립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12명의 제자들 사이에서도 이런 분쟁은 있었습니다.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더 큰 자인가에 대한 다툼이 있었고(눅22:24), 그 대표적인 예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권세를 잡으시는 줄로 착각 하고 미리 선수를 쳐서 예수님의 친척이 되는 그 모친까지 동원하여 예수님의 좌우편의 권세자리를 탐내었고, 이 사실을 알게된 다른 제자들도 분노하기 시작했습니다(마20:17-28).
성령으로 충만한 초대교회에서도 이런 분쟁은 있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행6:1)했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의 전도여행에 동행했던 바나바는 마가라고 하는 요한을 데리고 가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기는 사도바울과 더불어「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행15:37-39)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믿음 안으로 부르실 때, 먼저「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마5:9)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같은 공동체 안에서 분쟁이 많을 것을 주님도 미리 아셨기 때문입니다.

2. 문제는 지금도 교회 안에는 이 같은 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싸워야만 합니까? 서로 화평하면 하나님과 우리의 기쁨이 되고, 그 화평으로 말미암는 하나됨의 역사는 큰 능력으로 나타날 것인데, 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형제들과 싸워야 합니까?
우리 마음이 편하고, 날 괴롭히는 사람도 없다면, 우리의 마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넉넉한 마음과 자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로 인하여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끼리 서로 생각이 다름을 알게 되고, 그 다른 생각을 서로 고집할 때 심각한 관계로 발전하기 마련입니다.
그 뿐 아니라 사사로운 일들 속에서 서로 섭섭한 감정이 생기고, 그것이 쌓이면 마침내 감정이 폭발하거나 건너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마련입니다.
바로 그 대표적인 경우가 사도바울과 바나바의 관계였습니다.
그들은 같은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부름을 받고 동역자로 파송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선 문제를 놓고 도중에 큰 싸움이 나고 말았습니다.
일본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은 서로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친한 사람들끼리 사소한 일로 잘 다투기도 하고, 또 금새 화해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살아간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의 경우에는 여간해서 다투지 않습니다. 남을 위해 양보하고 남을 위해 될수록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참을 때 까지 참아보는 것이 일본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한 번 감정이 폭발하고 그 관계가 흔들리면, 지금까지의 그 관계는 여간해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3. 드라마 대조영을 보면 당나라의 침공을 앞에 놓고 고구려가 내분하여 결국 나당 연합군에 의해 무너지게 됩니다.
그런데 문무관의 싸움을 보면, 각자가 타당한 명분은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백성을 위하고, 고구려를 위하고 임금을 위한다면 명분으로 상대방을 제거하려고 하니, 결국에는 분열하고 자멸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국가나 가정이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다 잘하고자 하는 마음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원수가 되고, 피차 물고 멸망하고 맙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미운 사람을 앞에 놓고 참으면서 사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더 괴로운 것은 내 생각에, 분명히 상대방이 잘못했는데 내가 먼저 사과하고 내가 먼저 상대방을 용서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더 괴로운 일입니다.
왜냐면 결국 지금까지의 사건과 감정에서 내 잘못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상대방이 먼저 고개 숙이고 오면 나도 화해하고 양보할 마음은 있는데, 내가 먼저 그렇게 하기는 절대 싫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왜 하나님은 내 마음을 몰라주시고 그동안 좋았던 관계를 계속 유지하도록 도와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집사님들이 내가 정당하고 올바른 것을 몰라 준다는 것입니다.
왜 내 편을 들어주지 않을까? 그들이 내 편을 들어주면 이런 문제나 잘못된 관계도 회복될 수 있을텐데!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을 이해해 주지도 않고 도와주지도 않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4. 그러나 주님은 이런 우리도 참아 주시고 용납해 주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참아 주시고, 우리를 잘못된 관계를 통해 더 좋은 관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도 먼저 양보하고 화해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언제 사람들과 다투셨습니까?
그런데 그 분이 다투시면서 우리에게 당신의 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신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너무 억울하고 분하고,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도살당하는 어린 양처럼 잠잠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무리를 보고 흥분한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베어버릴 때에도,「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진 자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26:52)고 하셨시면서, ​「​이것까지 참으라」(눅22:51)고 하셨습니다.
교회 일을 하면서도 다 선한 계획과 진실한 마음으로 섬기려 하지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분쟁이 없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지막 까지 참으시면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여기까지 참으셨다면 우리도 참을 수 있고, 주님이 이렇게 용서하셨다면 우리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고 용서하고 양보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주님은 우리가 당신의 뜻을 우리의 삶을 통하여 이루시도록 우리를 도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주님은 분쟁하는 세상에 화목을 위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고, 그 일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심으로 화목의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5. 그러므로 우리도 인내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양보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용서하면서 살아야 하고, 먼저 상대방에게 다가가서 용서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 때, 상대방을 이기기 전에 먼저 자신을 이기고, 하나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왜 우리가 지금까지 마음에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불편하게 살아야 했습니까?
교회 오면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에 감사와 기쁨이 넘쳐야 하는데 왜 마음이 불편합니까?
참으면, 양보하면 평화가 오는데, 그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하는 내가 깨트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를 축복해 주십니까?
자존심이 강한 자를 축복하시는가? 아닙니다.
도리어「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잠16:5)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고집이 센 자를 칭찬하십니까? 성경에 자기 고집을 꺾지 못하고 망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가인은 고집이 세었고, 에서가 그랬고, 애급의 바로가 그 고집 때문에 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사람은 큰 능력과 기적을 베푸는 사람이 아닙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미운 사람도, 섭섭한 사람도, 이해가 안되는 사람도, 용서할 수 없는 사람까지도 다 용납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뻐하셨습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크게 번성하자 사방에 대적이 생겼고, 우물을 팔 때마다 그것을 아비멜렉과 그랄 사람들이 빼앗아 가도 그것으로 인해 불평하지 않았으며, 분쟁하지 않고 계속해서 저리를 옮겨 가면서 새롭게 우물을 팠습니다.
이러한 이삭의 모습을 지켜 보던 아비멜렉은, 스스로 찾아와서,「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 」(창26:28)다고 하면서, 분쟁의 당사자가 화친을 맺자고 이삭에게 요청하였습니다.

6. 하나님의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받는 직분도 귀하고, 역할도 중요하고, 많은 능력과 활동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의 결점과 잘못을 지적함으로 상대방을 공격하고 괴롭히지만, 우리는 덮어주고 도리어 내게 결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반면교사로 삼을 때, 우리는 더욱 성숙한 신앙과 인격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빌립보 교회에서 많은 일을 하였고, 그 영향력이 대단했고, 빌립보 교회를 세워 가는데 큰 공로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주님의 마음을 가지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았습니다.
피터 드러크는 경제, 정치, 경영 등에 관한 많은 책들을 저술했는데, 그 중에「미래경영」이라는 책을 보면, 우리가 이웃을 변화시키고, 공동체를 변화시키고, 사회와 국가, 세계를 변화시키는 그 힘의 원천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지금 나를 작은 일, 사소한 일로 감정을 상하게 만들어 미워하고 반복하게 함으로 우리가 받은 소명을 완수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이외에는 그 어떤 법도 능력도, 방법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로므로 사사로운 생각, 개인의 감정을 떠나서 복음을 위하여 함께 수고하고 더불어 사랑할 때, 우리 개인에게는 하나님의 은사와 능력과 축복이 넘치고, 교회는 더욱 아름답고 능력 있는 교회가 되며, 영원한 면류관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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