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2.9.유대 땅 베들레헴(누가복음2:1-7)
[성경본문] 누가복음2:1-7개역개정
1.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유대 땅 베들레헴(누가복음2:1-7/2007.12.9.오전)
1. 우리가 성탄절이 있는 12월이 되면, 크리스마스카드도 보내고, 케롤도 부르고, 츄리도 장식하며, 크리스마스 씰도 사서 붙이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사실 예수님의 출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들입니다. 심지어 12월25일 예수님 생일이라고 생각하고 지키는 성탄절조차도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날입니다.
주님의 탄생일을 사도들이나 속사도 시대에도 지켜진 적이 없습니다.
4세기 초에는 동방에서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키기도 했고, 안디옥 교회에서는 크스토무스가 서기 386년에 12월25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일로 제정하여 지켰지만, 이 축제를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에 집착하거나 어떤 상업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성탄절을 기념하거나 즐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신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바로 조명해서, 우리의 신앙에 유익을 가져오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자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출생하셨던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1절에서 「이 때에」라고 밝히는 시기는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으로 지배를 받던 때로, 그 당시의 로마황제의 이름이「가이사 아구스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본명은 옥타비아누스로 18살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언을 따라 그의 양자로 입적되었고, 기원전 31년에 일어난 악티움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물리치고 로마제국의 실권을 잡고 신적인 존재로 숭배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통치기반을 든든히 하기 위해 제국 전역에 국세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시기가「구레뇨가 수리아 총독되었을 때」라고 했습니다. 이 구레뇨는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퀴리니우스라는 사람으로 그는 기원후 6년부터 수리아의 총독을 맡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연도에 시간적인 차이가 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성경의 원문에는 이 구절이「구레뇨가 수리아를 다스릴 때」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예수님의 출생에 대한 정확한 연대를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였지만 정확한 년대를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헤롯대왕이 기원전 4년 유월절 직전에 죽었고, 그의 죽음이 있기 얼마 전에 예수님이 탄생하셨기 때문에 대체로 예수님의 출생을 기원전4년 5년쯤으로 보고 있습니다.
3. 문제는 우리가 정확한 연대나 날짜를 조사하는 것은 전문가들에게 일임하고,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밝히고 있는「이 때」가 어떤 때이며, 하나님은「이 때에」자기 백성을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이 때에」라고 밝히고 있는 역사적인 시기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매우 어려운 때였습니다. 로마의 속국으로, 헤롯왕의 악하고 잘못된 통치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소망을 잃고 고통 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통 하는 자기 백성의 고난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일찍이 히브리민족이 애급에서 엄한 고역으로 시달릴 때에 그들의 생명력을 왕성하게 하셨고, 그들이 학대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들로 번식하고 창성함을 더하게 하셨습니다(출1:12).
마침내 그들이 고통으로 탄식하며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출2:24)사 그들을 구원하시고, 약속대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장 어렵고 암담하여 더 이상의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불평하거나 실망하지 아니하는 것은, 그 때에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일하시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그의 구원과 그의 능력은, 그의 행하심은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더디고 늦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축복하시는 일에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인 줄 믿습니다.
눅1장에 보면,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경건한 사람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통하여 이미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을 진행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게 가장 어려운「이 때」는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이미 시작된 때인 줄 믿어야 할 것입니다.
4. 문제는 왜 「베들레헴」인가 하는 것입니다. 왜 요셉과 마리아가 함께 예루살렘도 아니고 지도에도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 작은 마을 베들레헴을 방문하여, 그것도 말구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4절에 보니「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하였습니다.
그들이 해산할 날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먼 여행길을 떠나 베들레헴에 이른 것은, 요셉이 다윗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이 베들레헴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그 지명의 의미가 떡집이이기 때문에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께서 이곳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 베들레헴은 요셉의 조상인 다윗의 출신지였기 때문입니다.
삼상16:18절에 보면 다윗을 가리켜「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7장에서도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고 하는 자의 아들」이라고 했고, 14절에「다윗은 말째」곧 8명의 아들 중에 막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베들레헴은 「다윗의 동네」라고 불리웠고,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기 때문에 당연히 베들레헴에 와서 호적을 올려야 했던 것입니다.
5.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은 이러한 다윗의 역사적 배경을 가진 베들레헴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기를 원하셨고, 이 사실을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곧「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미5:2)고 하였고, 그 예언이 오늘 본문의 가아사 아구스도의 호적명을 통하여 다윗의 후손인 요셉이 베들레헴에 이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을 통하여 곧 태어날 아기 예수는 평범한 출생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가장 영광스러웠던 시대의 중심에 있던 다윗왕가의 혈통을 잇는 왕의 위엄과 능력을 가진 출생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게속해서 미가5:4절에서「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끝까지 미치리라」고 함으로, 다윗은 이스라엘의 군주였지면, 그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는 전 세계와 온 우주를 통치하는 능력과 구원의 하나님으로 오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대하고 가치 있는 이 일을, 유대 나라의 중심인 예루살렘에서 행하지 아니하시고 무명에 가까운 예루살렘을 선택하신 것은, 그가 스스로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고, 낮은 자를 높이시며, 없는 자를 풍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좋은 환경과 조건가운데 출생하고, 그런 환경에서 살아가면서, 도리어 주어진 환경과 조건을 불평하고 탓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환경과 조건에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주시는 자,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를 축복하시고 붙잡으시고 능력의 일꾼으로 사용해 주십니다.
6. 「파라싸이트」라는 용어가 생긴지도 오래되었습니다. 부모의 경제적인 능력에 기생하여 자식들이 기생충처럼 부모에게 의존하여 사는 젊은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기생충 파라싸이트가 힘을 얻어 늙은 부모를 학대하고, 그 늙은 부모가 받는 연금을 갈취하고, 폭행하는 사례가 늘고 있어 또 다른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요 얼마 전에 오사카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 바로 그런 사례입니다.
늙은 모친이 받는 연금 15만엔을 갈취하고, 폭행하며 학대하던 60대 아들이,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연금과 함께 피신한 모친의 은신처를 밝히라고 하다가 사무실 직원의 머리를 망치로 수십 차례 쳐서 죽이고 말았던 것입니다.
환경이나 조건이 중요한 것 아닙니다. 내 하기 나름입니다.
베들레헴에서 가장 위대한 임금인 다윗이 난 것은 환경과 조건이 준 혜택이 아닙니다.
7명의 형님들은 자기들의 능력을 믿고 전쟁에 나가 싸웠지만, 다윗은 능력의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나가서 골리앗과 싸웠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이스라엘이나 다윗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인간이 아무리 무능하고 연약해도 자기에게 소망을 두는 자를 도우시고 축복하시는 분입니다.
7.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의 출생 환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어렵습니까?
7절에「맏아들을 낳아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사에 오시는데, 잠시도 머물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말구유에서 마리아는 몸을 풀어야 했고, 아기 예수는 말 먹이는 여물통에 뉘어야 했습니다.
유대인과 온 인류의 왕이며 구원의 메시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그의 작은 몸도 용납할 만한 공간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씀으로 온 우주와 천하를 만드셨지만, 정작 그가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는 그가 이용할 수 있는 제대로 된 공간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의 33년간의 생애는 인간적으로 보면 비참할 정도였습니다.
주님 스스로 고백하시기를,「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9:58)고 하셨습니다.
또한 십자가를 지실 때에는 마지막 남은 겉옷마저도 로마 병정들이 빼앗아 제비를 뽑아 나누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환경과 조건이 왜 이렇게 되야만 했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은 이 사실에 대하여 증거하기를,「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8:9)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다 함께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8. 우리가 잘 먹고 잘 살면 앞으로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가진 자는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없는 자는 주님을 더욱 의지하고 그의 도움을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있으나 없으나 나를 부요케 하시려고 스스로 가난해 지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인간관계나 어떤 조직 속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분노합니다.
그러나 그런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그런 대우를 통해, 예수님이 33년간 세상에서 받으셨던 너무도 잘못된 대우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은 그런 잘못된 환경과 조건을 탓하지 않으시고, 가난함과 부당한 대우 속에서도 두가지의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첫째는, 겸손한 자의 삶입니다.
이 겸손한 삶은 가난하고 연약하고, 병들고 방황하며 불쌍한 사람들을 섬김으로 나타났습니다. 참된 능력은 자신이 아니라 이런 사람들을 섬김을 통해 나타내셨습니다.
둘째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온 인류의 구원임을 아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기 까지 순종하셨고, 그 순종의 모습을 통하여 믿는 자의 참된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9. 일반인들도 그렇지만 선교사들 가운데도 일본이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땅 베들레헴 역시 인간적으로 보면 소망이 없는 땅이요, 고통의 땅, 소외되고 버려진 땅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땅인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곳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인 약속이 있는 땅이요, 다윗의 동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예언된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서는 이곳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하고, 이스라엘과 온 인류의 왕으로 오시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다윗왕가의 혈통을 이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베들레헴에서 메시야가 난다는 것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이나 다른 유대지역에서 베들레헴을 방문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적으로 관심이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특별히 예비된 소망의 땅이나 축복의 땅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른 곳에 간다고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듯이, 예수님처럼 어려운 환경과 조건 속에서 겸손한 자세로 살며, 내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 땅 일본에서 행하시고자 하시는 일에 쓰임 받는 다면, 그것 자체가 축복의 삶인 줄 믿습니다.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소원한다면, 일본도 하나님의 구원과 풍성한 은혜로 넘치게 되는 줄 믿습니다.

